반월성에서 경주 석빙고(慶州石氷庫)를 둘러봅니다.

교촌 최부자집을 둘러본 후 뒤편 길로 월성 역사지구 반월성으로 들어섭니다.

사실 교리만해도 교촌교를 건너서 인용사지를 거쳐서 월성교로 나오는 역사 볼거리가있지만 생략하고 반월성 너른 터전으로 바로 들어갑니다. 


반월성 안으로 들어서면 병풍처럼 둘러쳐진 솔밭 울타리 안의 드넓은 풀밭 연무장을봅니다.

한 무리의 화랑들이 앞가슴을 내 놓고 거친숨을 몰아쉬며 말을 달리고 화살을 날리며 내 앞을 방금 지나갑니다.


말 발쿱 바닥에서 튀어오른 흙먼지가 얼굴앞에서 바람에 날려갑니다.
상상의 품안에서 그 옛날 신라의 풀 냄새도 좋고 흙냄새도 좋습니다.


너른 반월성터를 가로질러 한여름 쉬원한 얼음물로 목을 식혔을 얼음창고 석빙고를 봅니다.


옛날 신라의 천연냉장고 석빙고가 반월성에 있었습니다.

현재의 경주석빙고(慶州石氷庫)는 조선시대에 다시 축조 한 것입니다.

경주석빙고경주석빙고


석빙고 앞에있는 석비와 석빙고 입구의 이맛돌에 새긴 내용을 보면 조선 영조 14년 1738 당시 조명겸이 나무로 된 빙고를 돌로 축조하였다는 내용과 그 4년 뒤에 서쪽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석빙고는 정확한 연대를 알수있는 문화재입니다.

원래의 석빙고는 현재 석빙고 위치에서 서쪽 100m 정도에 터가 있습니다.
이 석빙고의 큰 규모나 제작 기법면에서 뛰어난 석물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문화재입니다.


자연 얼음 냉장고 석빙고는 신라 지증왕 6년 505년에 얼음을 저장했다는 기록이 있음으로 신라 때의 빙고가 있었던것은 사실인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조선조에 축조할 당시 신라 석빙고를 보고 리모델링한것이라고 추측 해 볼 수도있습니다.


이 빙고는 입구가 월성 안쪽으로 나 있습니다.

입구를 보면 큰 돌 계단으로 내려가면 내부로 들어갈 수있게 되있습니다.

경사를 따라서 안이 깊어지고 내부의 사양을 보면 길이 12.27m, 폭 5.76m, 높이 5.21m 이군요.


구조를 보면 석재는 모두 가공된 것이며 석굴은 다섯개의 아치형 기둥 사이에 장대석이 걸쳐 있습니다. 이 세 군데 장대석 부근에 외부와 통하는 환기구가 뚫려 있습니다.

바닥 가운데로 배수로가 낮게 있어서 경사를 따라 성 밖으로 녹은 얼음물이 흘러나가게 되어있습니다.

외부는 흙으로 무덤처럼 크게 덮혀있는데 환기공만이 3개가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 경주석빙고는 보물 제66호로 지정된 귀한 문화재입니다.


참고로 이것과 비슷한 청도 석빙고도 있습니다.

시간을 내어 청도석빙고도 답사할 예정입니다.

이제 반월성과 석빙고를 본 후 박물관사거리를 통해서 동궁과 월지로 갈것입니다.


경주석빙고경주석빙고

경주석빙고 한기공경주석빙고 한기공

반월성반월성



 

지도 크게 보기
2018.12.1 | 지도 크게 보기 ©  NAVER Co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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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관광 교촌마을과 최부자집


경주관광을 하면서 시내쪽의 편리한 지점을 돌때 거치는 곳으로서 코스가 순탄하게 연결되는 지점에 교촌마을과 최부자집이있습니다.


이 루트를 지나면 안압지 동궁과 월지 석빙고 첨성대가 바로 연결되기때문에 들리는 필수 코스중 한곳입니다.
순서는 자유겠지만 저는 좀더 큰 동선으로 교촌 방향으로 진입해서 최부자집으로 나옵니다.

입구부터 민속마을 냄새가 물씬 납니다.
오래전에 보던 민속놀이 석상이 정겹고 우리의 옛날 어느 시골 동네 부자집 같은 느낌이 납니다.


교촌 마을엔 최부자집이 하이라이트이지만 각종 먹거리집이 많아서 좋습니다.

경주관광을 한다면 식사때를 교촌마을에서 맞이할 수있도록 시간을 맞추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경주 교촌마을은 인위적으로 관광 목적으로 만든 곳이 아니며 자연 마을입니다.

신라 신문왕 2년 682년에 한반도 최초의 국립대학인 국학이 있었던 마을이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신라의 국학은 고려대에 와서 향학으로 발전하고 조선조에 와서는 향교로 변형되어 이어졌다고 할 수있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지식기반 마을이라고 생각되는 지역입니다.


그러니까 이곳에 향교가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마을 이름이 ‘교동’, ‘교촌’, ‘교리’ 등으로 불렸습니다.

한자어로 동(洞), 촌(村), 리(里)는 전부 마을이라는 뜻이기때문에 어떻게 부르드라도 다 같은 말입니다.


교촌마을이 유명한것은 가난한 이웃을 도와주는 방법을 솔선 수범한 최부자의 모습때문입니다.

서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높이 사는 이념이라면 경주 최부자의 육훈(六訓)과 육연(六然)은 더욱 숭고한 철학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숭고한 사상을 모토로 실천하는 최부자의 고택이 있으며 그 후손들이 아직도 지키고있는 곳입니다.

이곳 최부자집이 있는 교리에는 관광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한민국 3대 김밥이라고하는 '교리김밥' 본점이 있는곳이기도합니다.


경주관광은 단체관광으로 운전사가 있거나 자차나 자전거로 해야 효과적으로 각 장소들을 방문 할 수가있습니다.


물론 시내버스나 도보로 할 수도있지만 황금같은 장소들을 하룻만에 돌아 보기는 너무 먼 거리들이 기때문에 유념해서 계획을 짜야합니다.

그래서 경주시는 곳곳에 주차 시설을 잘 해 두고있는데 교리에도 공영주차장이 있는곳입니다.

참고적으로 동궁과 월지 주차장에 주차하고 첨성대로 들어가서 교촌을 둘러 다시 나올때는 석빙고방향을 거치면서 계림으로 나와서 동궁과 월지를 관광하면 자동차를 회수하지 않고 동선을 완료 할 수가있습니다.


SONY | DSLR-A300



경주 최부자집의 육훈(六訓)과 육연(六然)


경주 최부자집(崔富者家)은 신라의 대 석학 최치원의 17세손인 최진립을 1대로 시작하는 가계이며 이후 최준(1568~1970)까지 12대를 이어온 402년간의 가계이며 지금도 이어가고있는 명문 가입니다.

이 최부자 가문은 12대에 걸쳐 만석(萬石)군 부자를 했으며 벼슬은 10대동안 진사(進士)만 했기로 유명합니다.


경주 최부자집의 가훈으로 그 유명한 육훈(六訓)이 있습니다.

최부자집이 그 유구한 세월동안 만석군 부자로 살아올 수가있었던것은 우수한 철학이있는 가훈 때문일것입니다.
오늘날 부자들이 이렇게 산다면 얼마나 존경 받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경주 최부자 가문의 육훈(六訓).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정치를 해서 당쟁에 얽히지 말라는 뜻).

2.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고 사회에 환원하라는 뜻).

3.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어려운사람에게 인정을 베풀어 적을 만들지 말라는 뜻).

4.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재산을 무기로 없는 자를 착취하지 말라는 뜻).

5.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솔선해서 검소, 절약하라는 뜻).

6. 사방 백 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어려운사람들에게 상부상조하라는 뜻 ).


경주 최부자집 가문의 육연(六然) -자신을 가다듬는 지침


1. 자처초연(自處超然) : 혼자있을때 초연하게 지내고

2. 처인애연(處人靄然) : 남에게 온화하게 대하며

3. 무사징연(無事澄然) : 일이 없을 때 마음을 맑게 가지고

4. 유사참연(有事斬然) : 일을 당해서는 용감하게 대처하며

5. 득의 담연(得意澹然):성공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고

6. 실의태연(失意泰然)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히 행동하라.

교촌입구의 이정표입니다.

경주관광 이정표경주관광 이정표



아이들의 놀이 석조각입니다.
지금은 민속놀이로 재현될 뿐 실제로 초등학교에서 이런 놀이를 하는진 모릅니다.


민속놀이민속놀이

경주 교촌 최부자집경주 교촌 최부자집

계림계림


계림의 고목입니다.
수령이 천년은 더 되었을것으로 생각됩니다.

계림계림


고택의 담장입니다.

돌꽃이 핀 기왓장이 아름답습니다.

고택의 기와고택의 기와

첨성대 전경첨성대 전경

경주관광 이정표경주관광 이정표

대능원을 나와서 교촌을 통과하고 동궁과 월지 입구로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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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아라가야 지역의 고대 유적들을 보면 놀랍습니다.

특히 고인돌은 멋지기까지 합니다.

또 이상한 동심원 문양은 무었을 그린 것인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정교하게 새겨놓았습니다.
바위돌에 새겨놓은 이런 문양들은 아무리 오래되어도 남아있는 기록으로 장점입니다.
현대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지금컴퓨터의 하드디스크나 종이에 프린트한 기록들은 많은 시간이 흐른다면 하나도 남아있을것이없습니다.

중요한 기록은 이렇게 바위에 새겨야 되겠다는 생각이듭니다.


고인돌SONY | ILCA-77M2고인돌

아라가야 고인돌SONY | ILCA-77M2아라가야 고인돌

함안 아라가야 고인돌SONY | ILCA-77M2함안 아라가야 고인돌

한안 고대 동심원 문양SONY | ILCA-77M2한안 고대 동심원 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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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있는 정감록(鄭鑑錄)비결과 천기대요.

우리집에있는 고서(古書).

정감록(鄭鑑錄)은 조선시대 이후
정치적 군사적으로 나라가 위급할 때 피난처등을 음양오행 또는 도교적 이론이 섞여서 풍수 지리적인 요소를 더해 만들어진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예언서입니다.


필자가 돈 주고 사 놓은것은 아니며 우리집에 오래전부터 있던 책입니다.
나의 윗분께서 취미로 공부해 볼 생각으로 가지고있었는지 모르지만 설마 위급할 때 이 책에서 해답을 얻으려고 상비약 처럼 가지고 계셨었지는 않았을것입니다.


하여튼 보관상태가 나빠서 너덜 너덜 하지만 그리 오래된것 같지는 않습니다.


정감록(鄭鑑錄) 내용에는 여러 가지의 감결류(鑑訣類)와 비결서(秘訣書)들의 발췌 집성으로 되있습니다.

또 가짜가 너무나 많아서 책마다 이본(異本)이 아니라는것을 상기하기위해서 진본(眞本)이라는 표시를 달고다니는것이 특징입니다.


세계 각국 민족마다 미래를 예측하는 예언서는 하나쯤 있기 마련인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예언서는 정감록(鄭鑑錄)임엔 틀림없습니다.


정감록(鄭鑑錄)안에서 언급된 비기들은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화악노정기(華岳路程記),구궁변수법(九宮變數法),동국역대본궁음양결(東國歷代本宮陰陽訣),무학비결(無學秘訣),도선비결(道詵秘訣),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징비기(徵秘記),토정가장비결(土亭家藏秘訣),경주이선생가장결(慶州李先生家藏訣),삼도봉시(三道峰詩),옥룡자기(玉龍子記) 등의 당대 비기들을 망라한다고 볼수있답니다.


정감록(鄭鑑錄)의 저자나 완성 시기에 대해서 왈가 왈부하고있지만 정확한 연대는 미상입니다.

이 책은 원래부터 조정에 반하는 내용들로 인해서 자칫 역성적인 성향으로 인식될 부담때문에 숨겼을것입니다.
또 현실적으로도 부정적인 내용들때문에 조선시대의 통치자가 싫어했을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금서 목록에 오르게되어 민간에서 은밀히 전승되었으며 그 내용은 증폭되어 비기(秘記)로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된 책입니다.

필자가 가지고있는 이 책도 정감록(鄭鑑錄)진본(眞本)이라고 쓰여있습니다.
진짜를 어디서 구해서 복사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옮겨쓴 분이 발행 할때 진짜로 인정받으려고 노력한것은 틀림없습니다.
송강이라는 붉은 도장도 찍혀있습니다. .


정감록(鄭鑑錄)진본(眞本).정감록(鄭鑑錄)진본(眞本).

정감록(鄭鑑錄)진본(眞本).정감록(鄭鑑錄)진본(眞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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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이스탄블 축제때 담아논 사진을 보면서 자세히 볼 수록 인상적인 인형 사진입니다.

동 서양을 막론하고 도구를 편리하게 만들어 사용하는것은 어느 나라의 옛날 물건이던지 보면
흥미롭습니다.


아래의 맷돌 돌리는 터키 인형은 좀 심할 정도로 어디서 많이 본 모양과 똑 같습니다.
사람의 얼굴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데 의상과 맷돌은 우리 나라 어느 골동품상에서 가져다 꾸민것같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맨 아래 칼국수 만들려고 밀가루 반죽 늘리는 작업 또한 똑 같지만 설마 칼국수를 만드려는것은 아닐
것입니다.

유라시아 대륙의 역사 흔적은 볼 수록 흥미롭습니다. 

 

터키인들의 옛날 공예품 맷돌 돌리는 여인과 밀가루 반죽 늘리는 여인은 의상만 바꾸면 우리나라
전통 공예품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


이스탄불 축제SONY | DSLR-A300이스탄불 축제

맷돌 돌리는 여인SONY | DSLR-A300맷돌 돌리는 여인

반죽 늘리는 여인SONY | DSLR-A300반죽 늘리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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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쪽에서 의령을 방문하면 입구에 정암진의 진문과 문루에 깃발이 휘날리고 문을 통과하면서 홍의장군의 동상이 멋지게 보인다.

정암진을 방문하고 홍의장군 동상을 바라보며 오래전 열악한 조건에서도 깊은 우국충정으로 의병 소부대를 이끌고 대군을 저지한 현장에서 그때를 상상해 본다. 


지금은 인도가 된 멋진 정암교와 차도 의령교를 이용해서 남강을 건널수가 있지만 임진왜란당시에는 나루터로서 교량이 없었다.

지금의 행정구역 의령군 의령읍 정암리 정암마을은 그때도 정암이었고 정암나루가 있던곳이다.

정암진SONY | ILCA-77M2정암진



전라도 곡창지대로 진격하려는 왜군제6군 엔코쿠지에케이(安国寺恵瓊)부대  2000명이 이곳에서 매복한 의병 곽재우군에게 패하고 임진왜란이 끝날때까지 전라도 방향으로 진격하지 못한 유일한 부대가 된다.

 

이곳은 1592년 음력 5월 24일 최초로 규합한 의병이 왜군과 싸워서 승리한 장소이다.

곽재우(郭再祐)는 선비였지만 우국충정으로 의병을 규합하고 적군에게 위세를 떨치기 위해 붉은 두루막을 입고 백마를 타고 여기저기에 나타나서 적의 기를 죽이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홍의장군이라고 부르게 된것이며 이곳에서 치른 전투를 정암진 전투(鼎巖津戰鬪)라고 부른다.


일본군 제6부대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전라도 진격 작전을 지휘하고 고바야카와의 휘하 엔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가 2000명의 군사로 전라도 길목 경상도 의령에 당도한다.

남강 북안 정암진에 매복한 의병 50명의 번개같은 치고 빠지기 작전으로 왜군은 꼼작도 못하고 정암진에 발이 묶이게 된다.


정암진에서 도하를 결행한 왜군은 늪지에 매복한 곽재우 장군의 의병에게 크게 당하고 안코쿠지의 주력군이 도하를 한후 미리 대기한 곽재우 의병의 기습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 최초로 의병을 일으키고 또 전투에서 승리를 한 곽재우 의병 부대는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의령현과 삼가현 두 곳을 곽재우휘하로 편입시켜주게 된다.


곽재우 의병은 점점 늘어나고 병력이 1000명 이상으로 증가 할때 전 목사 오운과 박사제가 거느린 3000명의 병력까지 합세되어 총 4000명의 대병을 거느린 부대로 발전하게된다.

정암진SONY | ILCA-77M2정암진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SONY | ILCA-77M2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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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시민공원을 가끔 가지만 무심코 지나치던 타임캡슐을 자세히 보고 사진으로 담았습니다.

2113년에 개봉 할것임으로 백년후에는 나는 이 세상에 없을 때이라서 상상을 하기는 좀 머 합니다.

그때 이세상이 얼마나 발전되어 있을지 아니면 도리어 고달픈 세상이 되어 있을지는 모른다.


다만 현재 부산의 모든것을 이곳에 담아서 보관시켜 놓았으니까 그때 개봉 할 때는 상당한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본다.


부산 시민 선언문 처럼
포용성과 역동성과 해양성과 쾌적성과 의리성으로 보다 낳은 삶을 살 수 있는 도시로 발전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나의 후손들이 이곳에서 내가바라는 대로 행복하게 살수 있는 도시가 되어서 이 타임캡슐을 열어서 100년전 과거를 기쁜마음으로 회상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부산 시민공원 타임캡슐SONY | ILCA-77M2부산 시민공원 타임캡슐

부산 시민공원 타임캡슐SONY | ILCA-77M2부산 시민공원 타임캡슐

부산 시민선언문SONY | ILCA-77M2부산 시민선언문

부산 시민공원 타임캡슐SONY | ILCA-77M2부산 시민공원 타임캡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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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재는 밀양시 산내면과 단장면을 오가는 고갯길로서 천왕산과 영산 사이로 넘는 높은 재입니다.


예로부터 고개가 너무나 높고 기상상태가 수시로 변덕이 심해서 가다가 위험하여 돌아오는 일이 많아서 붙여진 것이며 다시 돌아오는 재라는 뜻으로 도래재입니다.


이번 가을 단풍구경하며 표충사에서 얼음골로 얼음골에서 표충사로 이 고갯길을 요긴하게 이용하고 남기는 글이며,


이 고개에 서려 있는 이야기를 함께 하렵니다.


아주 오래된 옛적에 단장면에 사는 한 농부의 딸이 산내면 시례골의 화전민 아들에게 시집을 갑니다.


굽이굽이 일흔일곱 번을 돌아서 간 시집은 찢어지게 가난해서 조상 모시고 시부모 공양하고 살기가 너무나 힘들었답니다.


몇 년을 버티고 버텨도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어린 것은 등에 업고 고갯마루에서 부여잡는 신랑과 헤여저 친정으로 돌아왔답니다.

눈물로 헤어진 이 고갯마루를 뒤로하고 친정으로 돌아왔지만, 날이 갈수록 걱정되는 시부모와 그리운 남편이 불쌍하고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어서 좀 형편이 나은 친정집의 따뜻한 밥도 목이 매여 넘어가지도 않게 됩니다.


어느 날 머리에 일 만큼 손에 들 만큼 친정에서 얻은 양식과 곡식을 이고 들고 길을 나섰답니다.

집을 나와 비탈길을 오르고 올라서 겨우 겨우 고갯마루에 도착할 때는 이미 큰 산의 해는 기울고 있었습니다.


이때 어디선가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있었는데 , 못 잊어 울며 부르는 남편이 고개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아내가 떠난 후로 어느날 돌아 오더라도 위험하고 무서운 이 고개에서 다시 돌아가지 않도록 기다린 것입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해 허기진 남편은 기약도 없이 이 고갯마루에 와서 언젠간 아내가 돌아올 것을 믿고 날마다 기다렸던 것이었습니다.

재회한 부부는 한없이 울었고 어두운 산길을 사랑으로 길을 밝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친정에서 가져온 씨앗을 뿌리고 화전을 더욱 많이 일구며 '아무리 시집살이가 고달퍼도 너의 일생은 그 가문에서 끝을 보라.'고 하는 친정 부모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다시는 돌아가지 않고 참고 견디며 열심히 노력해서 넉넉한 농부가 되어 많은 후손을 남기고 크게 번성한 가문의 해피토킹 입니다...


그들의 후손은 이후 계속해서 번성하여 산내면의 시례골에 학문을 숭상하는 가문으로 내려오는데 ,시례골이라는 이름은 이 후손들이 시와 예를 숭상해서 모여사는 골짜기 마을이라는 뜻으로 시(詩)례(禮)가 있는 마을이라고 시례골이라고 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시례골 이야기를 생각하며  밀양사람 이재금(1941~97) 시인이 남긴 도래재라는 시를 읽으면 더욱 실감이 납니다.



도래재 - 이재금

 

언양땅을 넘어가면 석남고개

밀양땅을 넘어오면 도래재고개

일흔일곱 굽이굽이 소쩍새 울어

실안개 피는 자락 눈물 맺힌다


돌아서서 가신님 돌아오는 고개



지금은 자전거 매니어들의 라이딩 명소이며 자동차 초보딱지 떼는 도로연수 코스이기도 한 도래재를 왕복하며 표충사를 참배하고 얼음골 케이블카를 타고 천왕산을 오른후 하산해서 당일치기 부산까지 돌아온 이 놀라운 세상을 살면서,

좋아진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 지역의 교통상황 과 발전된 세상을 살 수있는 나를 생각하며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하나의 정서적인 지역으로서 고맙게 생각하는 곳입니다.


 

도래재도래재

도래재 고갯길 

도래재로도래재로

도래재 고갯길 

도래재로도래재로

도래재로 도래재 고갯길 


영남알프스의 산군들 중에서 약간 벗어난 날개 산인 명산 천왕산과 영산 사이의 유명한 고개이며 도래재 모습의 사진을 보면 현대기술로 닦은 고개도 이 정도인데 옛날 산길이 어느정도 였는지 짐작하기도 힘들것입니다.


도래재는 밀양시 산내면 남명리 내촌 일명 가래나무골에서 단장면 구천리 삼거리로 이어지는 전체 도로중에서 고갯길을 말합니다.



그래서 도래재라는 밀양사람 이재금씨의 시가 잘 알려저 있으며 첨부 한 것입니다.


현재 산내면 남명리와 단장면 삼거리로 통하는 도로가 확장·포장 되었고 도래재 도로가 잘 정비되어서 자동차로 드라이빙하기가 짜릿하고 좋습니다.


전국의 자전거 동호인들에게는 꽤 알려진 라이딩코스이기도 합니다.

겨울철이나 악천후 때에는 자동차운전도 유의해야 할 것이며 가끔 통제되기도 하는 도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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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교과서 입니다.
불과 반세기 정도 진난 과거의 우리의 선배님 부모님들이 공부하던 교과서입니다.
여기 이 책들로 부터 얻은 지식과 교양을 바탕으로 오늘날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발전한 나라로 존재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나라든지 어린이들이 배우는 교과서는 바른 잣대로 올바른 사고를 심어 줄 수 있도록 구성 되어야 할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편향되거나 진실이 왜곡되어서는 안될 것이며 가장 필요한 기초 지식이나 학문의 기본이 되는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바르게 인도하는 내용이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오래된 초등교육을 담당했던 교과서를 보면서 지난 세월들을 회상하거나 또는 신세대 분들은 과거를 살펴 볼수 있을 것입니다.

아주 어려운 시절에도 교육을 하려고 노력한 흔적들을 볼 수 있습니다.


셈본은 산수 이며 수학 교과서입니다.
바른생활이나 도덕은 예의범절같은 사회 기초 윤리를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오래된교과서 바른생활SONY | DSLR-A300오래된교과서 바른생활

옛날 중학교 교과서SONY | DSLR-A300옛날 중학교 교과서

옛날 교과서 국어 SONY | DSLR-A300옛날 교과서 국어

사회생활, 도덕 SONY | DSLR-A300옛날 교과서 사회생활, 도덕

예날교과서 셈본SONY | DSLR-A300예날교과서 셈본

옛날교과서 국어SONY | DSLR-A300옛날교과서 국어

미군정청 시대 초등학교 교과서SONY | DSLR-A300미군정청 시대 초등학교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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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기 특별전을 보고


복천박물관에서 목기(木器) 특별전을 보면서 구구단목간(九九段木簡)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구구단이 현대인의 기본적인 셈법인것으로 만 알고 있던 나는 이미 백제시대에 구구단을 사용한 자료를 보고 백제의 화려한 건축물이 이미 발달한 수학이 바탕 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구구단목간(九九段木簡)SONY | ILCA-77M2구구단목간(九九段木簡)

학계에서는 관리가 조세업무를 원만히 집행 하기 위해서 보다 빠른 셈법을 이용했으리란 추측을 한다.


여기서 깊은 지식을 요하는 학술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며 일반인으로서 백제 사비성터 발굴 유물 중 곱셈 기초공식인 ‘구구단’을 써넣은 널판지 이른바 목간(木簡)을 여기 복천박물간에서 그 실체를 본후 놀라운 느낌을 말 하는 것이다.


이미 1500여년 전에 백제는 목간(木簡)에 쓰인 구구단을 이용해서 무었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수학적으로 계산을 확실히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주
목간(木簡) : 
작은 나무 널판지나  나무쪽에 쓴 문서


백제 사비성터인 충남 부여읍 쌍북리 일대의 옛 관청터에서 나온 6~7세기께 목간들중에서 정밀판독 결과 1점이 구구단을 적어놓은 목간의 깨진 일부임을 확인한 것이다.

좌측 사진처럼 구구단 목간은 길이 30.1cm, 너비 5.5cm로 깨진 판자조각인데 얼핏 칼 모양처럼 생긴 목간 일부이다.


사진으론 확인 할 수 없지만 희미한 먹글씨로 수십여개의 숫자들이라고 한다.

옆에 판독 결과를 적은 것을 보면 한자로 쓴  ‘九(구) '' 八十一(팔십일) 등의 숫자로서 위로 9단 부터 쭉 써 놓은것을 알 수 있다.


생활의 지혜라는 슬로건으로 목기 특별전과 함께 특별 강연도 들으며 철기나 토기만 보다가 목기를 보면서 조금은 신선한 느낌을 받는다.


목기전에서 보는 대부분의 농기구들은 내가 어릴때 실제로 보던 농기구와 별반 다르지 않은것을 알수 있었다.


양반들은 이미 고급 수학의 이치를 깨친 시기일것입니다.
구구단을 모르는 하인들이 볼 때는 자기들은 1분정도 이상 걸려서 세어봐야 아는 물자의 갯수를 양반들은 한번 쓱 쳐다보면 몇개인지 알거든..ㅎㅎ
역시 양반들은 천재야 !
하도록 양반들은 지식을 하인들에게 절대로 공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구단 목간이 발견된것이 백제시대이지만 훨 그 이전부터 마술처럼 위력있는 구구단을 암암리에 전수되고있었을것입니다.

모르긴해도 서역에서 장사의 귀재라고하던 아라비아 상인들은 물론 이런 구구단 셈법을 알고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목기(木器)SONY | ILCA-77M2목기(木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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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성(水原城) - 화성(華城)탐방 후기 

UNESCO World Heritage


수원화성엘 맘먹고 가 봤다.
부산에서 수원이 그리 멀다 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짬을 내기가 힘들었는데 기회가 되어 올봄에 한바퀴 둘러 봤다.


시간관계상 빨리 많이 보는 수단으로 화성 열차를 이용하여 둘러본 후 그때 담은 화성(華城)영상과 함께 후기를 남긴다.

한마디로 감탄스런 우리의 유물이며 조선시대 성곽의 진수를 본다는 느낌이다.

특히 오랜세월 축조한것도 아니고 단기간에 이렇게 아름답고 효과적인 성곽을 완성 할 수 있다는것이 오늘날의 중장비를 동원하는 토목공사를 비교해서 생각해 볼 때 가히 불가사의로 남겨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토목, 건축등의 전문인이 아니지만 일반인이 보는 느낌으로 이렇게 아름다운 구성이나 실제적인 전투를 가상하드라도 완벽할 정도로 방어가 가능한 구조인 성곽이란 생각이 든다.


다만 이렇게 훌융한 성곽에서 방어전을 완벽하게 수행했다는 혁혁한 전쟁기록이 있어으면 더 좋았을텐데.아쉽다.


우리에게 이 성곽의 예술적 가치나 유물로서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세계유산으로 등재가 되고 세계인들이 찾아와서 세계어떤 나라의 성곽보다 우수한 
수원성(水原城) - 화성(華城) 의 진가가 알려진다는 것은 자랑스런 일이다.

기회가 된다면 도보로 샅샅이 한번더 살펴보며 탐방하려고 한다.



수원성(水原城) - 화성(華城)SONY | ILCA-77M2수원성(水原城) - 화성(華城)


수원성(水原城) - 화성(華城)SONY | ILCA-77M2수원성(水原城) - 화성(華城)


수원성(水原城) - 화성(華城)SONY | ILCA-77M2수원성(水原城) - 화성(華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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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나무(堂山樹).Shamanic tree  

당산나무(堂山樹)는 보통 마을의 입구나 서낭당에 있는 오래된 고목으로 대부분 신성한 영역으로 생각하며 보호되고 있다.

영-호남 지역 곳에따라서 마을의 수호신으로 당산신을 모시고 마을공동으로 지내는 마을제사를 행하는 곳도 있다.
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당산신은 당산할아버지(당산할배)의 경우와 당산할머니(당산할미)의 경우가 있으며 둘다 모시는 곳도 있다고 한다.

대부분 마을의 안녕이나 농사의 풍년 질병으로 부터 보호등을 기원하는 의례로 본다.
때로는 당산굿이라고 하는 동제(洞祭)나 당제(堂祭) 또는 동신제(洞神祭)라고도 하는 의식을 말 한다.

마을 공동체나 신녀가 행하는 제일(祭日)은 음력 정초에 정월대보름에 가장 많이 치르지만 개인이 집안의 우환이나 자식의 원행등의 안전을 빌기도하고 자손이 귀한집에 치성을 드리기도 한다.

공동체의 제일은 정해저 있으나 개인적인 기원은 정초에서 대보름까지 가 가장 많고 10월 보름에 제사 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에도 제관은 신중하게 선택하며 부정타는 장소를 가지 않고 삿된 행동이 없는 깨끗한 사람이 행한다.

특히 제관이나 치성을 드리는 사람은 출산가(出産家)나 상가(喪家)에 근래(당월)에 가지 않은 사람이어야 하고 개고기 등의 음식을 절대 피해야 하며 다툼을 하지 않아야한다.

심신(心身)을 청결히 하고 근신하며 당산나무(堂山木)에 금줄을 두르며 황토 몇 줌을 부근에 놓아 부정을 막는 표시를 한다.

역사적으로는 단군(檀君)의 역사에서 언급되는 신단수(神壇樹)는 박달나무이며 이는 가장 오래된 당산나무(堂山樹)라고 볼 수 있다.

아래는 우포늪 둘레길을 걷다가 우포늪을 바라보는 양지바른 동네앞의 얕으막한 산에서 만난 당산나무를 담아 온 것입니다.

당산나무(堂山樹)  Shamanic treeSONY | ILCA-77M2당산나무(堂山樹) Shamanic 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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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충신(忠臣)이 된 명(明)나라 장수 천만리(千萬里).
부산 자성대 기념비로 보는 근대사의 인물 조선 충신 화산군(花山君) 충장공(忠莊公)천만리(千萬里). 

근세사의 귀화인물 천만리(千萬里)장군은 무신으로서 명(明)나라에서 귀화한 이국인(異國人)이지만 대를 이어 조선조정에서 충신으로 살았으며 충장(忠莊)이라는 시호를 받고 전국각지에 조정이 배향하는 인물이며  [두산백과 - 천만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천만리] 
[인명사전 - 천만리]. 등에  등재 소개되고 있는데 공부하는 자세로 알아봅니다.
 

장군은 중국 하남성의 영양(潁陽)이 본관인데 중국에서의 가계도는 알려지지 않지만,
우리나라에선 
영양천씨(潁陽千氏)의 중시조입니다. 
무신으로 귀화했지만 문신으로 여생을 살며 저서로 시 44수와 문 2편이 '사암천문집'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장군은 명나라의 수위사 겸 총독장(守衛使兼總督將)으로 정유재란 때 조선에서 전공을 세우고 귀화하여 한국 영양 천씨의 중시조가 되었으며  충장공(忠壯公)시호를 받은 조선조정의 충신(忠臣)입니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은 1597년 8월 도요토미 정권 일본군이 임진왜란의 정전회담이 결렬됨에 따라 재차 조선을 침공하여 이듬해인 1598년 연말까지 지속된 전쟁임.


자성대SONY | ILCA-77M2자성대



이하 장군의 대략(大略)과 행적을 알아봅니다.


숙종조에서는 공적을 기리기 위해 ‘대보단(大報壇)’을 설치 종향(從享)했다.
고성(固城)의 호암서원(虎巖書院-
호암사(虎巖祠)), 청도(淸道)의 황강서원(皇岡書院 - 황강사(皇岡祠)), 문경(聞慶)의 노양각(魯陽閣), 진양(晉陽)의 만첨각(萬瞻閣), 안동(安東)의 동산서원(東山書院), 남원(南原)의 환봉사(環峰祠) 등에서 배향됩니다.


현재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부산진지성이었던 자성대(子城臺) 누각옆에 장군의 기념비와 안내문이 있어 후세에 기리도록 하고있습니다.
묘지는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방촌리입니다.


천만리(千萬里)장군의 대략(大略)

자: 원지(遠之), 호: 사암(思庵), 시호: 충장(忠壯).

천만리(千萬里)는 1543년出生 ~ 歿未詳

부(父) 천종악(千鐘嶽),
모(母) 병부시랑 전탁(錢鐸)의 여식(女息).

부인 : 영녕백(永寧佰) 허언(許彦)의 여식(女息)..

장남 : 천상(千祥) ,  차남 : 천희(千禧)

9세때부터 외숙(外叔) 전륜(錢倫)으로부터 수학(受學)함.


* 1571년 무과 장원 급제.
* 1575년 총절사(總節使)로서 당시 침공하던 몽골군을 격퇴함.
대몽전쟁의 공훈으로 내직(內職) 내위진무사(內衛鎭撫使)가 됨.
억울한 참소를 입어 양릉(陽陵)에 귀양살이함.
귀양8년후 복직되어 태청전수위사(太淸殿守衛使)와 총독오군사를 겸직함.

태청전수위사때 1592년 조선의 왜란에 명나라에서 원병으로 참전하는데 명황제의 명으로 조병영양사(調兵領糧使) 겸 총독장(總督將)이되어 파병됨.

아들 천상(千祥), 천희(千禧)와함께 3부자가 당시 총대장 이여송(李如松)휘하에서 군량 수송업무를 관장함.


장군은 압록강(鴨綠江)건너 곽산(郭山)에서 첫 전투를 치루는데 철기(鐵騎) 2만 명으로 제독(提督)이여송(李如松)휘하에서 대승을 거둠.


곧바로 평양(平壤)으로 진군 주둔하는 왜병을 포위함.

제3차 공성전에서 대포로 평양성 칠성문(七星門)을 공격 문짝을 폭파하여 승세(勝勢)를 몰아 적군 1,280여 급(級)을 제거하는 성과를 거둠.


연전승전하며 남하하여 지금의 부산인 당시 동래(東萊)성 까지 이르며 적의 전의를 꺾었다.

1597년 정유재란때 마귀(麻貴)제독 휘하로 조선에 파병됨.
중사마(中司馬)직책으로 왜병과 직산(稷山)에서 마주쳐 매복전술로 대승하는데 당시 적군이 잡초가 쓰러지듯 했다고 한다.

이후 왜군은 울산(蔚山)까지 도망 치고 계속 추적공격해서 완승을 거둔다.
당시의 공로를 지금의 서생 당시 서생진(西生鎭)의 바위절벽에 새겨놓았다.


조선인 천만리(千萬里)장군의 대략(大略)

왜란이 종전되어 1600년 선조 33년  8월에 명장 만세덕(萬世德)과 이승훈(李承勛)은 명나라 본국으로 귀국함.

이때 
천만리(千萬里)장군은 두 아들과 함께 조선에 머물어 귀화합니다.
그는 한양에 머물며 조선 명산을 다니는데 그때 금강산(金剛山)을 세번 탐방하고 두류산(頭流山)을  두번 탐방했다고 합니다.
이때 머무는곳에 시를 읊어 심정을 남깁니다.
시심(詩心)은 대체로 고국 명에 대한 그리움과 이국땅의 고신(孤臣)을 표현함.

장군은 이미 당시의 명나라가 국운이 다 해 감을 알고 오랑캐로 부터 짓밟히는 곳에 후손의 삶을 맛기지 않는 선견으로 사상이나 철학이 비슷한 조선에 남고자 한 것입니다.

명은 이후 장군의 예측대로 오래가지 못하고 망합니다.


당시 선조는 천만리(千萬里)를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봉조하(奉朝賀)의 벼슬을 내려 화산군(花山君)에 봉하고 하사금 전(田) 30결(結)을 함께 내려 신하로 삼습니다.

그의 장남 천상(千祥) 또한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으로 차남 천희(千禧)는 평구도찰방(平邱道察訪)으로 벼슬을 삼아 자손대대로 세록을 전수받게 하여 깊은 신하로 대우합니다.

숙종(肅宗)에 이르러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해서 종향(從享)함.
1827년 순조(純祖)때는 신주(神主)를 부조(不祧)함.
1910년 7월 26일 순종은 종헌으로 높이 칭한다는 뜻으로 충장(忠莊)이라는 시호를 하사함.

이로서 천만리(千萬里)3부자는 조선의 신하로서 조정의 충신으로 후세에 남게 됩니다.


장군의 두 슬하는 각각 6남, 4남을 두며 한국 영양 천씨 10파를 이루어 융성한 후손이 이땅에 번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충장공(忠壯公) 천만리(千萬里)SONY | ILCA-77M2조선충신(忠臣) 충장공(忠壯公) 천만리(千萬里)


충장공(忠壯公) 천만리(千萬里)SONY | ILCA-77M2충장공(忠壯公) 천만리(千萬里)


충장공(忠壯公) 천만리(千萬里)SONY | ILCA-77M2충장공(忠壯公) 천만리(千萬里)


천만리(千萬里) 기념비천만리(千萬里) 기념비




 

일반인의 지식으로 천만리 장군에 대한 이력을 공부하는 자세로 알아본 것이며 부족한 내용이 많을것입니다.
잘못된곳을 댓글이나 방명록으로 지적해 주신다면 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첨삭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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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천영현 2016.05.22 14: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시 한 번 중시조님에 대해 되새겨 봅니다.
    감사합니다


봉황대에서 만난 황세바위의 슬픈이야기

김해시의 역사유물이 조밀하게 남아있는 중앙부근에 있는 봉황대에서 황세바위를 본다.
황세바위 이야기는 슬픈 내용이지만 함께자란 소년들의 순수한 모습들을 연상케하는 바위이다.

아래 사진으로 보는 황세바위는 가락국 제9대 겸지왕(숙왕)때 황정승의 아들 이름이 황세인데 황세가 놀던 바위라고 해서 황세바위로 불린다. 

당시에 황정승과 출정승이 있었는데 둘은 절친해서 아들을 낳으 의형제로 살게하고 아들딸이 나면 배필로 살게 하자는 약속을 한다.

이후 황정승은 아들을 낳고 출정승은 딸을 낳는데 갑자기 출정승의 가세가 기울어 몰락하게 되어 배필로 보내지 않으려고 아들이라고 속여서 아들처럼 키운다.

황세와 여의는 형제처럼 함께 자라는데 사내 아이들이 잘 하는 오줌멀리 누기를 당시에 황세와 여의도 이 바위위에서 누가 더 멀리 오줌을 누는지 시합을 한다.

여의는 기지를 발휘해서 삼대 (경상도방언으로 제릅대)를 끼워서 사내처럼 오줌을 멀리 눈
이야기가 전해오는 바위이다.

둘은 점점 자라서 여의가 여인의 형태를 때쯤 황세가 이상이 여기고 거북내(해반천)에서 멱을 감자고 한다.
여의는 더이상 속일 수가 없어서 여자임을 밝히고 둘은 결혼하게 된다.

그후 황세는 신라와의 전쟁에 나가서 큰 공을 세우게 되어 왕명으로 유민공주와 결혼하게 된다.
이후 여의는 크게 상심하여 황세를 그리워하다 죽게된다.
황세 또한 상심하여 병을 얻어 같은해에 세상을 떠난다.
유민공주 또한 상심해서 유민산(임호산)의 사찰로 출가하여 여승으로 여생을 보낸다.

지금도 나즈막한 구릉지 봉황대에는 행복했던 황세와 여의가 소년으로 놀던 이 바위는 천년도 더 지난 지금도 사람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애틋한 마음을 전해주고 있다.  

봉황대 한켠에는 여의의 넋을 기리는 여의각이 있어 마음을 짠하게 한다.

황세바위SONY | DSLR-A300황세바위


황세바위SONY | DSLR-A300황세바위



가락국 대략 :

김해는 그옛날 금관가야(金官伽倻)또는 본가야(本伽倻)의 지역으로서 42년부터 532년까지 존재했던 한반도 남쪽에서 신라에게 멸망하기 전 까지 가락국(駕洛國)이라는 국명으로 강력한 국각이었다.

가락국(駕洛國)은 대략 1세기 중기에서 4세기 말까지 여러가야로 뭉친 가야연맹체의 맹주였다. 4세기 말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다가 400년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도와서 공격함으로 종발성 등 낙동강의 동쪽과 북쪽 지역 현재의 부산, 양산, 밀양에 대한 지배력을 잃어버리고 반파국과 안라국에 연맹체의 맹주 자리를 내어 준다.

많이 사용되고 있는 금관가야(金官伽倻)라는 국명은 역사적으러 한참 뒤인 고려의 왕건이 붙인 이름이다.

사서에서는 구야국(狗邪國),구야한국(狗邪韓國)으로 표시되고 있는데 狗자의 상고음(上古音)이 '가이'라고 하며 狗邪는 '가이야'나 혹은 '가야'로 발음되기 때문에 가야국이라고 하는것으로 얄려지고 있다.

시대가 바뀌면서 발음이 조금씩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가야(伽倻, 加耶, 伽耶), 가락(駕洛, 加洛), 가라(加羅, 伽羅, 迦羅), 가량(加良) 등의 한자로 표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야의 다른 이름인 가라(加羅, 伽羅, 迦羅)는 외국을 지칭하는 일본어 'から(가라)'로 전해진다.
일본 서기에서는 '가락국은 수나라(須那羅)'라고 쓰고 있는데 우리말로는 '쇠나라'로 읽히는데 가야국의 풍부한 철기문화에서 당시 왜(倭)와 교역할때  쇠(鐵), 즉 철기나라로 말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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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계곡에 남긴 고대인의 메시지-암각화

대곡천계곡으로 단풍나들이를 하면서 고대인들이 남긴 메시지를 봅니다.

극 청정지역의 아름다운 계곡에 물든 단풍과 깊은 골짜기를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대곡천 계곡을 걸어가면 현대인의 찌든 마음은 힐링되고도 남습니다.

이 아름더운 계곡의 푸른 초장에 때묻지 않은 고대인들이 천진하게 웃으며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에 시끌벅적하든 아득히 먼 어느날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들이 남긴 메시지를 봅니다.

신석기시대나 철기시대같은 오래된 연대의 시기를 지금 생각하면 그 시대의 먼 지점이 실감이 나지는 않지만,
적어도 지금의 우리와같은 문명시대의 상식으로 해석할수 없는 생활을 하던 집단이 이 아름다운 계곡에서 무리지어 살면서 무었인진 모르지만 메시지를 남긴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제발 이 아름다운 고대인들의 흔적지에 자동차-길내고 다리놓고 아스팔트깔고 계단을만들어 그들이 남긴 터전을 완전히 바꿔버리지 말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후손들이 이 아름다운 계곡에 남긴 이땅의 고대인들의 메시지를 온전히 해독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 아름다운 대곡천을 거닐면서 담은 사진과 그들이 남긴 메시지를 본다..

대곡천의 아름다운 경치SONY | ILCA-77M2대곡천의 아름다운 경치

대곡천 계곡의 아름다운 자연.

대곡천의 아름다운 경치SONY | ILCA-77M2대곡천의 아름다운 경치

대곡천 계곡의 가을풍경


반구대의 아름다운 경치SONY | ILCA-77M2반구대의 아름다운 경치

아름다운 대곡천계곡에서 고대인들이 뛰놀며 춤추고 노래하던 모습을 상상해 보며 그림같은 가을 경치를 봅니다.

 

반구대 암각화SONY | ILCA-77M2대곡천 반구대 암각화

저 건너편 바위벼랑에 그들이 그려놓은 수많은 그림 메시지 중에서 산돼지 같이 생긴 그림하나가 흐미하게 바짝 땡긴 망원렌즈에 잡힙니다.


반구대 암각화SONY | ILCA-77M2반구대 암각화

대곡천 반구대 너른 바위를 캔버스로 그려놓은 고대인들의 예술작품을 봅니다.


반구대 암각화SONY | ILCA-77M2반구대 암각화

아마도 돼지를 그린것인지 모릅니다.

돼지같이 생긴 또다른 동물일지도 모르지만 동물그림인것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어떤 연장으로 이 바위위에 이렇게 선명하게 새겨 놓았는지 모릅니다.

때때로 조선시대에 만든 비문이 흐려서 볼수 없는 것을 생각하면 이 바위그림은 얼마나 깇이 새겨논 것인지 유추 할 수 있습니다.


도항리 암각화SONY | ILCA-77M2도항리 암각화


이 그림은 함안의 도항리 암각화입니다.
확실하고 선명한 동심원이 무었을 말 하는진 모르지만 쓸데없이 할일이 없어서 바위에 이런 정교한 그림을 힘써서 남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심원의 주위에는 작은 점들이 있군요.
좀 오버스런 유추인진 몰라도 철학적인 또는 과학적인 메시지라는 느낌이 듭니다.


칠포리 암각화SONY | ILCA-77M2칠포리 암각화


이 그림은 더욱 미스테릭한 느낌을 주는 칠포리 암각화입니다.

오늘날의 화가처럼 예술성있는 정물을 남기려고 했을까요?
항아리 그림같은 이 암각화는 오늘날의 어는 미술가가 그린 작품같은 느낌을 줍니다.


보성리 암각화SONY | ILCA-77M2보성리 암각화

보성리 암각화 입니다.위의 칠포리 암각화와 느낌이 비슷하게 옵니다.
그래도 다른긴 하군요.이런걸 보고 있으면 고대인들의 흔적을 찾아보는 재미가 점점 증폭됩니다. 


가흥리 암각화SONY | ILCA-77M2가흥리 암각화

이 그림은 상당이 화련한 작품입니다.

가흥리 암각화인데 약5m정도의 대작입니다.
고대인들의 큰 미술대전이 있었나봅니다 ^_^..
아마도 금상을 받은 작품이 안닌가 싶을 정도로 현대인의 눈으로 봐도 어떤느김이 강열하게 오는 암각화 입니다.


도암리 암각화SONY | ILCA-77M2도암리 암각화

이 사진은 도암리 암각화를 좀더 뚜렷하게 보려고 사진술을 발휘해 본 것입니다.


천전리 암각화SONY | ILCA-77M2천전리 암각화

많은 의문을 제기하는 천전리 암각화입니다.

보다 기하학적인 그림은 추측을 불허하는 의미있을것으로 생각되는 그림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집단의 대장이 영토를 나타내는 지도 같기도 하고 도로나 어던 공식을 말하는것처럼도 보입니다.신앙의 대상물로서의 표시이든 고대 예술가가남긴 작품이든 관계없이 나 스스로 이그림에 가장많은 의미를 주고싶은 고대인의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천전리 암각화SONY | ILCA-77M2천전리 암각화

위그림을 보다 선명하게 찍은 것입니다.
천전리 암각화는 고대인들의 작품위에 시대가 바뀔때마다 덧쉬워저서 신라시대의 그림까지 겹쳐있어서 더욱 재미를 느끼며 근접해서 볼 수 있는 장소라서 더 애착이 가는 작품입니다.

또 아름다운 계곡의 경관도 좋기 대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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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11.04 09: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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