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대학교안의 고풍스런 석조건물 


부산대학교 박물관(釜山大學校 博物館)은 부산광역시 금정구 장전동의 부산대학교 교정안에 있는 박물관이다.
역사의 시대별로 유물들을 전시해 놓았으며 유물들은 대부분 동래 복천동에서 수집된 것들이 가장 많다.
부산의 지방 박물관으로서 부산지방 유물들이 잘 전시 보존되고 있는 곳이다.

숲속에 고풍스런 석조건물로 자리잡고 있으며 그리 크지는 않지만 꽤 분의기도 있고 여름철에는 계곡의 물소리와 함께 쉼터로서도 좋은 곳이다.
독도자료 전시행사때 방문하고 담은 박물관전경사진 몇장 올립니다.

부산대학교 박물관(釜山大學校 博物館)SONY | ILCA-77M2부산대학교 박물관(釜山大學校 博物館)


부산대학교 박물관(釜山大學校 博物館)SONY | ILCA-77M2부산대학교 박물관(釜山大學校 博物館)


부산대학교 박물관(釜山大學校 博物館)SONY | ILCA-77M2부산대학교 박물관(釜山大學校 博物館)


부산대학교 박물관(釜山大學校 博物館)SONY | ILCA-77M2부산대학교 박물관(釜山大學校 博物館)


부산대학교 박물관(釜山大學校 博物館)SONY | ILCA-77M2부산대학교 박물관(釜山大學校 博物館)





이름 : 부산대학교 박물관
관람시간 : 주중 09:00~17:00
휴관일 : 주말, 공휴일 및 학교에서 정하는 휴관일
입장료 : 무료

전화 : 051-510-1835
팩스 : 051-581-2455
주소 : 부산시 금정구 장전동 산30번지 부산대학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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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자연사 박물관에서 만난 인상깊은 가면(탈)

Harvard Museum of Natural History

이 아름다운 작품은 우수한 예술 작품이지만,작품으로 있는것이 아니며 역사 유물이다.
이름없는 어느 옛날사람이 사용하던 역사 유물로서 여기 하버드 자연사 박물관까지 와있는 것 이다.


하버드 자연사 박물관을 둘러보며 담아온 많은 사진들을 다시 찾아 보면서 오랫동안 시선이 머물던 이 두개의 탈은 다시보아도 정말 아름답기도하고 인상깊다.

이 탈이 언제 누가 왜 만든것인지 등을 따저 묻는 것은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몫이고,
나는 이 탈속에 자리잡았던 어느 원주민의 선한 눈망울을 상상 해 보고 싶다.


보이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얼마든지 만들수 있지 않는가 말이다  

가면은 자기를 무섶게 보이고 싶었는지도 모르지만 전혀 무서워 보이질 않는다.

이 유물이 어느나라 누가 만든것이며 어느시기에 만든것인지 알고 싶지도 않다.

나라이름이나 민족이나 지역등의 데이터가 잎혀지는 순간 나의 아름다운 상상이 희석되기 때문이다.   .
 

아름다운 가면(탈)SONY | ILCA-77M2하버드 자연사 박물관에서 담은 아름다운 가면(탈)


아름다운 가면(탈)SONY | ILCA-77M2하버드 자연사 박물관에서 담은 아름다운 가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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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차정의사(朴次貞義士) 생가 방문후기


박차정(朴次貞).가명 임철애(林哲愛), 임철산(林哲山)은 1910년 5월 7일 ∼ 1944년 5월 27일까지 34세의 생을 산 한국의 여성독립가이며 이곳 박차정(朴次貞)생가는 국가보훈처로부터 현충시설 40-1-2호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국충가효PANTECH | IM-A860K국충가효



마안산이나 망월산을 산책 할 때 안내판으로 보던 박차정(朴次貞)의사의 생가를 방문했다.
칠산동을 지날때 무심코 보며 지나치던 박의사의 생가를 보게 되었다.

여성(女性)독립운동가 박차정의사(朴次貞義士)PANTECH | IM-A860K여성(女性)독립운동가 박차정의사(朴次貞義士)



박차정의사(朴次貞義士)

그는 경상남도 동래(東萊)군(지금의 부산시 동래구 칠산동)에서 부(父)박용한 모(母)김맹련의 3남2녀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父)박용한: 일제 침탈에 항거하다 울분으로 자결함.
큰오빠 박문희 둘째오빠 박문호:신간회,의열단등에서 활동.

박차정은 1925년 동래일신여학교(지금의 동래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재학중 항일의식으로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문필이 뛰어나서 교지 일신에 항일민족의식이 담긴 작품도 남긴다.

이후 의사는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중앙상무위원으로서 전국적인 여성운동과 함께 민족운동을 주도적으로 하며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연장선상으로 일어난 1930년 1월 서울역에서 11개 여학교 시위투쟁 "근우회"사건을 지휘해서 일경에 검거되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다.

의사는 1930년 가중되는 일본의 핍박중에 의열단의 둘째오빠의 연락을 받고 중국으로 망명한다.망명후 1931년 의열단장 김원봉과 결혼하고 의열단 핵심단원으로 활약한다.

의사는 남경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임철애등의 가명으로 여자교관으로 활동한다.

중국에서의 활약은 의열단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 민족혁명당 부녀부 주임,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 등이며 조선민족전선연맹에서 홍보부에서 활약했다.

의사(義士)는1939년 2월 장시성(江西省) 쿤륜산(昆崙山 곤륜관)전투에 참가하여 전투중 어깨에 부상을 입는다.
이후 후유증으로 1944년 5월 27일 34세의 나이를 일기로 투혼의 삶을마친다.

이상 박차정 의사의 생가에 비치된 항일여성독립운동가 박차정의사 안내 유인물의 내용입니다.복사 편집중에 오기가 있을수 있습니다.
댓글로 지적하면 바로 잡겠습니다.

여성(女性)독립운동가 박차정의사(朴次貞義士)PANTECH | IM-A860K여성(女性)독립운동가 박차정의사(朴次貞義士)



추기(追記):
의사(義士)는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했고 남편 김원봉도 월북하여 북한에서 장관급 각료를 역임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평가받지 못하다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현재 부산시 동래구 칠산동 동래고등학교 맞은편에 생가가 복원되었고 부산시 금정구에 동상이 조성되 있다.
-추기 내용은 위키에서 발췌함-


여성(女性)독립운동가 박차정의사(朴次貞義士)생가PANTECH | IM-A860K여성(女性)독립운동가 박차정의사(朴次貞義士)생가


PANTECH | IM-A860K

생가에 비치된 안내장 마지막에 적혀있는 것입니다.
격문같은 느낌이 드는 교가의 가사인데 박 의사가 작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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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소녀들이여 가슴의 피 용솟음치는 동포여

울어도 소용없는 눈물거두고 결의를 굳게하여 모두 일어서라 
한을 지우고 성스런 싸움으로,
필승의 의기가 여기서 뛴다.
-박의사가 만든 조선혁명간부학교 교가의 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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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 98번길 129-10
행정구역: 동래구 칠산동

관람시간:09::1800 관람료:무료 
박차정 의사 생가 문의처:
박차정 의사 생가 051-556-0527,
문화공보과 해설예약 051-550-4082

왼쪽 이미지는 안내장에 쓰인 박차정의사의 생애에 대한 내용 전문이며 본 블로그의 내용은 이것을 복사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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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리킹 2015.11.28 21: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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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비경(8경) 임경대(臨鏡臺) 탐방

시(詩) 
황산강(黃山江) 임경대에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6~ ?)


안개낀 봉우리들 빽빽하고 물은 넓은데,
거울속에 비친 인가들 푸른 봉우리와 마주하네.
외로운 돛배 바람안고 가는데,
날으던 새 갑자기 자취없어 아득하구나.
(주: 임의 번역 편집)

烟巒簇簇水溶溶 -연만족족수용용
鏡裏人家對碧峰 -경리인가대벽봉
何處孤帆飽風去 -하처고범포풍거
瞥然飛鳥杳無終 - 별연비조묘무종.


황산강(黃山江)은 지금의 낙동강을 말 하며 임경대(臨鏡臺)는 거울을 바라보는 언덕이란 뜻이지요.낙동강 너름 물을 바라보며 자연이 만든 거대한 거울이라 하고 거기에 비친 아름다운 그림들을 노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운(孤雲)최치원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자연히 해운대(海雲臺)를 마나게 되며 또다른 자는 해부(海夫)이며 여기 임경대(臨鏡臺)를 만나게 된다.


고운(孤雲)이라고 알려지고 있는 최치원의 또다른 자(字)는 해운(海雲), 해부(海夫)이다.

고운(孤雲)최치원은 12살에 당나라에 유학해서 18살에 당의 과거에 급제하고 승무랑시어상내공봉 등으로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중국 남방의 황소의 난때 그유명한 "토황소격문"으로 반란을 토벌하는 공을 세운것을 볼때 뛰어난 문장력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29세에 신라로 귀국하지만 국운이 저물어가는 시기었다.
국가를 혁신하는 골품제의 개혁과 과거제도를 실시하자는 등의 골자로 시무(時務) 10조를 진성여왕에게 청 하지만 ,시행되지 않았고 그는 벼슬을 버리고 유람하는데 우리는 이때 남긴 자취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자 고운(孤雲)처럼 외로운 구름(孤雲)을 연상케 하듯이 신라방방곡곡을 유람했음을 느낄수 있다.이때 부산 해운대,거창 수승대,합천의 백운동등을 답사하며 시와 함께 지명을 남기게 된 것이다.


이곳 낙동강가의 아름다운 비경에서도 잠시 머물며 "황산강(黃山江) 임경대에서"라는 시를 남겼으며 지명이 연유하게 된다.
양산비경 임경대는 그의 자를 빌려서 고운대 혹은 최공대라고도 하고 있다.

천재는 외롭다고 했던가 ?
후세에서는 너무 고매하고 앞선 학문으로 아마도 시대가 맞지 않았을것으로도 생각해 보며 능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한 안타까움을 말 하기도 한다.
고운의 생을 마친 흔적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홀연이 사라젔다고 한다.
그래서 
856~ ?으로 표시되고 있다.


당에서 돌아와 그가 집필한 서책들을 모아서 헌강왕에게 바쳤던 "계원필경"은 한국 최고(最古)의 문집이다.또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난랑비서(鸞郎碑序)"는 화랑도의 사상을 이해 할수 있는 자료로 알려지고 있다.

고운(孤雲)은 경주 최씨(慶州 崔氏)의 시조라고 합니다.
그분은 신라 말기의 문신으로서 유학자이며 뛰어난 문장가이시다.당나라나 신라 왕실에서 벼슬도 했지만 정치가로 말 하는 곳을 보지 못했다.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해부(海夫)이며 시호는 문창(文昌)이다. 

 

고운 최치원 자세히 보기 링크
https://ko.wikipedia.org/wiki/최치원



임경대(臨鏡臺)가는길임경대(臨鏡臺)가는길


참고: 부산 구포에서 무궁화호 완행열차를 타고 물금역에 내려서 길걷기로 약 4Km정도를 도보로 갔다가 푹쉬고 다시 물금으로 돌아와서 기차타고 부산으로 왔습니다

물금역SONY | ILCA-77M2물금역



양산8경 임경대(臨鏡臺)양산8경 임경대(臨鏡臺)


양산8경 임경대(臨鏡臺)SONY | ILCA-77M2양산8경 임경대(臨鏡臺)


임경대(臨鏡臺)유적지SONY | ILCA-77M2임경대(臨鏡臺)유적지


양산8경 임경대(臨鏡臺)SONY | ILCA-77M2양산8경 임경대(臨鏡臺)


양산8경 임경대(臨鏡臺)SONY | ILCA-77M2양산8경 임경대(臨鏡臺)


양산8경 임경대(臨鏡臺)SONY | ILCA-77M2양산8경 임경대(臨鏡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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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로 밝히는 우리땅 독도(獨島)

무단 복사 불허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독도(獨島).
시마네현(島根縣)고시 40호가 엉터리이며 이를 근거로 주장하는데 대한 반박 자료입니다.


우리나라 땅을 우리가 우리것이라고 말 해야 하는 상황이 참 어처구니도 없습니다.

남의나라 땅을 저그땅이라고 우겨대는 이웃나라가 괘씸하고 속 상하지만 차분하게 원칙을 가지고 대응해야 할 것 입니다.


보편적인 상황에서는 우리땅을 우리땅이라고 대 내외에 외칠 필요는 없습니다.

대한민국은 우리땅이라고 떠들어 댄다면 우스운 일이겠지만 독도 문제는 좀 다른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확실하게 그리고 철저히 매듭지어서 후손들에게 부하(負荷)로 남겨서는 안될 것 입니다.


그동안 독도가 우리땅이기 때문에 우리땅이라고 대 내외에 알리는데 다소 소홀했는지도 모르지만 일본은 집요하게 저그땅이라고 주장합니다.


워낙 집요하게 주장하기 때문에 내용을 잘 모르는 제3국의 외국인들은 일본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논란의 대상으로 삼을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독도가 우리땅인것은 명백 하지만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영토적 표시를 언제부터 했는가의 근거 자료들을 발굴하고 그 자료를 근거로 정확하게 일본에게 반박하고 세계인들에게 논리적으로 알릴만큼 충분하게 챙겨야 합니다.


또 일본의 억지 내용을 정확히 알아야 역공이나 방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일본이 독도가 저그땅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도 자세히 알아야 하며, 우리국민 누구나 그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다면 일본이 주장하는 근거는 형편없는 억지임이 만 천하에 드러날것입니다.


그런후에 이 사실을 제대로 모르는 세계의 여러나라 사람들에게 우리국민 누구나 쉽게 지세히 말해 줄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맹점은 그냥 독도는 우리땅이고 일본이 나쁘다고 하는 태도입니다.
만약 외국인이 왜 독도가 한국땅이고 왜 일본이 나쁘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무었이라고 대답 할 것입니까?
몇세기전에 프랑스 지도에 독도가 한국땅이라고 그려져있다거나 러시아 지도에 독도가 한국영토로 그려저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그 후 일본이 독도를 일본땅이 되었다는 시기와 이유를 아는것이 더 중요합니다.
심지어 오래된 일본 지도에도 독도가 한국땅이라고 그려진것도 다수 발견되고있습니다.
일본은 그런것을 아랑곳하지 않는것은 시마네현고시 이후를 가지고 주장하고있는것입니다 .


일본이 독도를 저그땅으로 편입하였다는 문서는 아래의 사진처럼 시마네현고시 제40호 입니다.이 고시를 한 후부터 독도는 저그땅이라는 것입니다.
이 고시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무단 복사 금지

시마네현(島根縣)고시 40호의 허구시마네현(島根縣)고시 40호의 허구 부산대학교박물관 독도전에서 촬영함. 이니셜은 임의 삽입한것임


임의로 이거 한장 비밀로 써놓고 남의 영토를 저그땅이라고 우겨대는 우스운 일의 증거라서 담아 왔습니다. 

붉은 X표는 오용될 가능성때문에 필자가 그린것입니다. 


그러면 시마네현 고시 제40호의 내용을 알아 보겠습니다.


이 내용이 되는 배경의 시기는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은 러시아 함대를 동해 바다쪽으로 끌여 들여서 해전을 준비합니다.


이때 독도는 천혜의 감시 초소로 적합하기때문에 울릉도와 독도에다 일본 본토와 통신망을 연결하는 동시에 감시 망루를 세웁니다.


그러나 독도가 한국 영토이기 때문에 일본 군부는 전쟁 수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시킬 것을 주장합니다.


이에 일본 정부는 1905년 1월 28일 각의에서 결정을 한 후 동년 2월 22일 독도와 가까운 ‘시마네현(島根縣)고시 40호'라는 문서를 통해서 독도를 일방적으로 자기땅으로 편입합니다.


즉 주인이 있는 남의 나라땅을 당시에 상대적으로 힘이 없다고는 하나 엄연히 주권 국가인 이웃나라의 소유인 독도를 이 고시 40호를 통해서 저그 땅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하 [독도박물관 인용]편집.


자세한 고시 내용을 풀어서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 오끼도와의 거리는 서북 85리에 달하는 도서를 죽도(竹島-다께시마)라고  칭하고, 지금부터 본현 소속 오끼도사(隱崎島司)의 소관으로 정한다."

로 되 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불법 무도한 편입 사실은 러일전쟁이 끝나고 일본의 통감정치가 확립된 후인 1906년 음력 3월 5일에서야 대한제국에 알려집니다.


알려진 내용을 보면  "이 고시는 현재 일본국으로 독도가 편입이 되었는데  " ,
'무주지선점론(無主地先占論)’에 입각하여, 국제법적으로 정당한 영토 편입이라고 주장을 한 내용으로 되 있습니다.


'무주지선점론(無主地先占論)’이란  말은 주인이 없는 바다의 섬은 먼저 점령하는 국가의 소유가 된다는 국제법을 들고 나와서 편입시킨 것이라서 정당하다는 말입니다.

어이가 없는 내용입니다.

대한제국을 얒잡아보고 억지로 해당이 안되는 법을 적용시켜서 빼앗았다고 통보 하는 것을 애둘러 정당한것 처럼 말장난으로 나열 한 것입니다.


일본은 그때 이 문서의 내용대로  "독도는 1905년 당시 주인없는 땅(무주지-無主地)이었으므로 일본이 무주지(無主地)를 선점(先占)할 경우 영토획득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라는 국제법상 요건을 충족시켰기때문에 시마네현(도근현)에 편입된 합법적인 일본의 영토"라고 지금까지 주장하고 있는것 입니다. 


이들이 독도를 문서 한장으로 저그땅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시마네현은 지금도 "다케시마(竹島)를 회복하자"는 내용의 입간판을 현내에 세워놓고 자세한 내용을 잘 모르는 일본인들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이를 이용해서 광고 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러나 이 내용을 잘 알아보면 이 고시는 법적 효력이 전혀 없는 것이며 또 그 자체가 고시로 존재 하지도 않는 회람(回覽)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문서가 효력이 없는 이유 첫째 :


독도는 당시 주인없는 땅 무주지(無主地)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고시라고 만든 회람 문서가 만들어진 1905년보다 앞선 1900년10월22일 대한제국 칙령 41호로 울릉도에 강원도의 27번째 지방관제 군수를 파견할 때 이미 그 관할 구역인 당시이름 석도(石島:당시에 불려지던 ‘돌섬’이라는 한자식 표기)가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울릉도 군수가 독도를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주지(無主地)가 엄연히 아니었습니다.

아래사진은 1883년 울릉도 개칙령 이후에도 일본인들의 수탈이 지속되어서 관제를 개편 군수를 임명한 칙령의 사진입니다.


무단 복사 금지

대한제국 칙령 41호대한제국 칙령 41호.......이미지는 부산대학교 박물관 독도전 소책자에서 카피 한것이며 아니셜및 설명 필기는 임의 삽입한 것임.

[부산대학교박물관 배포 소책자 확대사진]


또한 내세우는 주장을 보면

일본 군부가 독도에 대한 불법 영토편입을 추진하면서 독도가 자기땅이기 때문에 일본 수산어업가가 독도 근해에서 조업권을 따려고 바다 임대원을 일본 정부에 제출하였는데 그 문서인 이 "中井養三郞의 ‘리앙꼬島領土編入 貸下願" 이라는 문서를 봐도 저그땅이라는 것입니다.


정확한반론 


이 일본 수산 어업가 中井養三郞의 ‘리앙꼬島領土編入 貸下願’이란 문서는 사실 중정양삼랑이 독도근해의 바다를 빌려서 조업을 하기위해 독점 어업권을 대한제국으로부터  획득하려고 한 문서인데  개인으로 대한제국을 상대해서 바다를 빌리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일본정부에다가 도움을 요청한 문서 인 것입니다.


당시 농-상무성 수산국장과 해군성 수로 부장의 공작에 의해서 대하원(貸下願)에 ‘리앙꼬島 영토편입’이 추가되어서 대한제국정부에 갈 문서가 일본정부에 청원된 것입니다.


더구나 당시 일본 내무성은 러일전쟁이 종결되기 전에 독도를 편입시키는 것은, ‘한국정부의 저항’으로 쉽지 않을 것이며, 열강에게 ‘일본이 한국병탄의 야심이 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을 갖게 할 위험이 있다고 영토 편입을 반대하고 있던 때 입니다.


즉, 당시 영토편입 당사자인 일본은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였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으로, 독도의 영토편입은 국제법상으로 불법적인 것입니다.



이 문서가 효력이 없는 이유 둘째 :


저들이 주장하는 대로 국제법을 보면 선점(先占)의 경우라고 하드라도 무주지(無主地)역을 자국의 영역에 편입한다는 사실을 국내외에 공표하게 되어있는데, 

일본은 독도를 편입한후 그러한 절차를 편법으로 처리하였을 뿐 아니라, 편입사실 자체를  철저히 비밀에 붙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다른 도서(島嶼)는 자국의 영토로 편입 할 때 각의(閣議)를 거쳐 해당 관공서와 신문에 고시해온 관행(慣行)이 있습니다.


유독 독도의 경우만 소위 [시마네현고시 40호]를 당시 일본의 104개 신문 중 어디에도 고시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일본의 관보(官報)에 조차도 5년후인 1905년 6월 5일에서야 비로소 고시에 명시된 ‘다케시마(竹島)’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문서의 원본에 대한 의문점:


현재 이 고시의 원본은 유일하게 시마네현청에 단 1장 보관되어 있는데, 

이 문건은 1905년 2월 22일 당시 시마네현에서 발간됐던 [시마네현령(島根縣令)]이나 [시마네현훈령(島根縣訓令)] 어디에도 수록돼 있지 않은것입니다.
 

더구나 이 문건에는 회람(回覽)이라는 주인(朱印)이 선명하게 찍혀 있습니다.

따라서 고시도 아닙니다.


이로써 일본이 내세우는 [시마네현고시 40호]는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고시가 아니라 관계자 몇몇이 돌려본‘회람(回覽)’에 불과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몇가지 내용만으로도 일본의 독도에 대한 영토편입 합법성 주장과는 달리 당시 독도 영토 편입이라는 것은 극비리에 진행 되어야 했던 명백한 침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

독도는 러일전쟁 중에 일본 제국주의의 확장 과정에서 불법 침탈 되었으며, 

독도의 침탈은 한반도 침탈의 시작이었습니다. 


우리는 일본이 증거로 내세우는 [시마네현 고시 40호]를 통해서 도리어 일본이 억지로 주장하는 내용을 알게 되고 그들 스스로 역사의 진실을 밝혀주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는것을 알게 됩니다.


독도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으로 알아보려고 한 내용이며,  
이글은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담은 사진과 거기서 얻은 자료와 독도박물관에서 얻은 자료를 인용 편집한 것입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댓글로 지적하면 수정 또는 첨-삭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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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omnislog.com BlogIcon RiverWind blogessay46 2016.05.18 09: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독도는 러일전쟁 중에 일본 제국주의의 확장과정에서 불법 침탈되었으며,
    독도의 침탈은 한반도 침탈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일본이 증거로 내세우는 [시마네현 고시 40호]를 통해서 도리어 일본이 억지로 주장하는 내용을 알게 되고 그들 스스로 역사의 진실을 밝혀주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는것을 알게 됩니다.

  2. 나그네 2016.11.09 17: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제가 궁금했던걸 풀어주는 글이군요...

    일본은 죽도라는걸 독도라고 칭할수 없다고도 애기하면서 우리측 주장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 하더군요..

    즉 죽도가 독도라는걸 인정을 하지 않아야 일본이 내세우는 모든게 정당화 되어진다고 생각하는가 봅니다..

    퍼가겠습니다...

  3. Favicon of http://sephia.tistory.com BlogIcon sephia 2018.07.13 15: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내용 관련해서 이야기가 있는데 좀 골때립니다.

    2013년의 일인데, 당시 독도 관련 시민단체인 독도 일본에 알리기 운동연대(독도련)에서 시마네현에 쳐들어가서 독도 편입 문서 원본을 보자고 한 일이 있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무도 생각하지 못 한 일이 터졌는데 당시 시마네현 관계자가 "68년 전에 일어난 화재로 인해서, 시마네 현의 독도편입 행정 문서 원본이 소실되었다"는 답변을 했다는 겁니다. 실제로 68년 전인 1945년에 마츠에시 소요 사건으로 인해 현청사가 불탔다고 하니, 시기상으로 거의 맞아 떨어지는 일입니다.

    (참고 : 마츠에 소요 사건은 1945년 8월 24일, 일본 제국이 패망한 1945년, 덴노가 옥음방송으로 "우린 졌다…" 이라고 선언한 지 거의 열흘만에 시마네 현 현청사 소재지인 마츠에에서 발생한 극우 세력들의 항복반대 폭동입니다.)

    게다가 현재 존재하는 문서는 필기체 기록으로 남아있는 동년의 다른 기록들과는 다르게, 이후에 인쇄기로 뽑아낸 사본이라고 하니, 더욱 어이가 없는 일이고...... 독도련에서 화재가 난 시기를 물어보니 1945년 8월 24일, 시기적으로 저 사건과 맞아 떨어집니다.(-_-;;;;)

    그리고 2013년 12월 7일......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는 원본과 사본 둘 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최종 확인 됐습니다. 시마네현에서 보관중인 것은 현지사의 직인이 없고 회람용이라고 하니, 돌려보는 정도였을 겁니다.

    여담 : 일본은 1905년 이전에 독도를 부르는 이름이 육/해군이 달랐다고 하네요....;;;

    관련 기사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6586556
    - http://www.kb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306068

    • Favicon of https://omnislog.com BlogIcon RiverWind blogessay46 2018.07.16 07: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그렇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따지고 들여다 보면 남의 나라 국토를 뺏으려는 주장 치고는 너무나 어이없는 근거를 가지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분청사기(粉靑沙器) 또는 분청자기(粉靑磁器)
분청사기도장무늬잔 사진-분청사기인화문마상배(紛靑沙器印花文馬上杯)


분청사기(粉靑沙器)는 조선시대에서 전기에 발달한 도자기이며 조선백자가 성하기 이전에 활발히 사용되던 것이며 이는 분장회청사기를 줄여서 분청사기(粉靑沙器)로 부르게 된 것이다.


흔히 청자를 귀하게 여기지만 청자는 우리나라에만 있는것은 아니다.

중국에도 있지만 고려청자가 뛰어나서 귀하게 인정하고 있지만 분청사기는 한국에만 있는 우리고유의 도자기이다. 

이 도자기는 아주 평범하면서 단아하고 규칙이 자유로운 형태이지만 뛰어난 품격을 자랑한다.특정 권력구조의 영향을 받지않고 민간에서 서민적으로 자유로운 형태로 제작된 생활자기이지만 현대에 재조명해 보면 단정하면서 꾸밈이 없고 아름답다.


화려하지않으면서 아름답고 고급스럽지 않으면서 고상하다고들 한다.
그래서 이 
분청사기(粉靑沙器)를 진정한 한국인의 유물이며 또한 우리의 미적 감성이 가장 잘 스며있는 자기라고들 말한다.

이런 종류의 분청사기(粉靑沙器)는 특별히 일본인들이 좋아하는것으로 알려지고있다.
세계적인 우리의 특색 있는 문화유산 
분청사기(粉靑沙器)한점을 집중적으로 촬영했다.


이런종류는 세계 다른나라에서도 존재하지만 우리의 분청사기(粉靑沙器)처럼 생동감이 있으면서 단아하고
조형미가 안정적인 형태의 분청사기는 없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의 분청사기는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가장 완벽한 자기로 인정되는 문화유산이다.

이 사진을 찍기전에 오랫동안 감상하면서 오래전에 우리의 선조들이 사용한 생활자기였을 작품아닌 작품에 깊이 매료되어 담아온 사진을 올립니다.

분청사기(粉靑沙器) SONY | ILCA-77M2분청사기(粉靑沙器)


분청사기(粉靑沙器) SONY | ILCA-77M2분청사기(粉靑沙器)


분청사기(粉靑沙器) SONY | ILCA-77M2분청사기(粉靑沙器)


SONY | ILCA-77M2


분청사기인화문마상배(紛靑沙器印花文馬上杯)SONY | ILCA-77M2분청사기인화문마상배(紛靑沙器印花文馬上杯)

이 분청사기(粉靑沙器)는 김해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유물입니다.




2015/05/18 - [여행-문화유적/역사/고전] - 보스턴 미술박물관(Museum of Fine Arts)입구에서


2015/04/29 - [분류 전체보기] - 인상깊게 본 자바미술품


2014/12/18 - [여행-문화유적/역사/고전] - 동래부사 유심(東萊府使 柳沈)과 전생(前生)어머니


2014/12/06 - [여행-문화유적/역사/고전] -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


2014/09/24 - [여행-문화유적/역사/고전] - 대가야의 현장 고령 지산리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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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신께 간절히 구(求)하나이다 !

Appeal to the Great Spirit.

하늘을 우러러 간절하게 구하는듯한 모습의 아메리카 인디언의 동상


보스턴 미술관(Museum of Fine Arts)은 세계 4대 미술관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웅장하고 소장 스케일이 큰 양질의 많은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미술작품 박물관입니다.


세계4대 미술박물관은 파리의 루브르, 생트 페테르부르의 에르미타주,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이곳의 보스턴 미술관(Museum of Fine Arts)입니다.


이곳에 있는 소장품들은 130년에 걸쳐 모은 작품들로서 질적으로 양적으로도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여기를 방문할때가 이곳은 아직 겨울의 긴꼬리가 드리우고 있을때이지만 우리나라는 봄꽃이 피는 시기였습니다.
계절을 거슬러 올라가서 한국에서 지나고 온 겨울을 여기서는 아직 끝나지 않고 있어 또 만나게 된 것입니다.

위대한 신에게 간절히 구 하나이다 ! Appeal to the Great Spirit.위대한 신에게 간절히 구 하나이다 ! Appeal to the Great Spirit.

보스턴 여행기를 이제사 기억을 더듬어 가며 조금씩 산발적으로 쓰지만 워낙 지역에 대한 지식이 없는 터라 중요하고 스케일이 큰것만 사진을 중심으로 기억을 떠 올려 봅니다.

보스턴 미술관(Museum of Fine Arts)입구에서 느낌이 복잡하게 다가오는 말탄인디언의 동상을 바라봅니다.
아직 저 안에 있는 대단한 유물들을 보기도 전이지만 이 대단한 인디언 동상을 바라보면서 저 안에 있는 세계3대 미술관이라고 하는 이곳의 소장품들을 유추해 보고도 남습니다. 


이 거대한 미술관에 들어 가기도 전에 이미 깊은 느낌으로 다가온 이 인디언의 동상을 보면서 오길 잘했다는 생각으로 흥분되었습니다.

이 동상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면서 현대 미국이라는 나라가 있기까지 아메리카 인디언과의 이야기속에는 어떤 모순들이 안타깝게 남은것을 알 수 있습니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와서 미지의 땅에 내려서 북미의 매서운 겨울정착에 무지한 백인들을 인디언 추장 매사소이트가 이 황량하고 거친 대륙에서 살아 남을수 있도록 지혜와 식량을 나눠주고 농법도 가르쳐서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살아남아서 새봄을 맞을수 있도록 배려했답니다.


오늘날 매사추세츠 주의 어원이 바로 이 인디언 추장의 이름을 딴 것이구요.
그는 이땅에서 사라지고 없지만 매사소이트의 땅이라는 뜻으로 주 이름을 정한것이며 알고 나서 상당한  느낌이 교차합니다. 

그때 이후 백인들은 빠르게 막강해지고 이땅의 역사와 더불어 살아온 인디언들은 도륙당하고 일정지역을 벗어 날 수도 없는 보호 구역에서 살아가는 형편에 처하게 되었구요.


오늘날 그 용감하고 지혜롭던 
매사소이트의 후예들을 생각케 됩니다.
남의 나라 역사이지만 우리는 역사속에서 많은것을 배울수 있게 합니다.

도래인에게 은총을 베풀고 사라진 인디언 후예들의 가슴을 대변해서 울부짖어 호소하는듯한 작품이군요.

작품의 이름 역시 Appeal to the Great Spirit 입니다.
번역해 본다면 " 위대한 신이시여 간절이 바라나이다 ! " 정도일 것입니다.

이 작품은 사이러스 에드윈 댈린(Cyrus Edwin Dallin) 이라는 Utah 출신 작가의 "Appeal to the Great Spirit"이라는 제목으로 1909년도 제작된 것입니다.


작품의 배경은 이 작가가 어린시절 native American(인디언)들과 어울려 자라면서 오랫동안 그들과 함께 삶을 함께하며 가슴에 담은 그들의 영혼을 이 거대한 청동상에 녹여붓고 깍아낸 작품으로서 그때의 한 소년이 받은 순수한 영감을 되살려서 완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목이 Appeal to the Great Spirit. (위대한 신에게 간절히 구 하나이다 ! ) 이다.

아픈 인디언들의 마음을 한 예술가가 작품으로 대신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에 보여드리는 사진은 방문할때 입구에서 샤터를 마구 눌러 담아온 여러장의 사진중 일부입니다. 

미술관이 현재의 장소로 이전되던 1909년에 제작된 사이러스 에드윈 달린(Cyrus Edwin Dallin)의 위대한 신에게 간구하나이다 라는 작품입니다.

보스턴 미술박물관(Museum of Fine Arts)입구에서 만난 이 작품이 주는 필링은 조금후에 저안에서 만날 수많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 충격을 줄 지 가늠해 볼수 있습니다.



위대한 신에게 간절히 구 하나이다 ! Appeal to the Great Spirit.SONY | ILCA-77M2위대한 신에게 간절히 구 하나이다 ! Appeal to the Great Spirit.


위대한 신에게 간절히 구 하나이다 ! Appeal to the Great Spirit.SONY | ILCA-77M2위대한 신에게 간절히 구 하나이다 ! Appeal to the Great Spirit.


참고:
우리는 서슴없이 아메리카 인디언이라고 말 하는데 
실제로 이곳에서는 N
ative American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말 하는 인디언과는 다른 내용이며 아메리카원주민이라는 것을 강조 합니다.

실제로 그들앞에서 인디언이라고 부르면 안됩니다.






2015/05/16 - [여행-문화유적] - 프루덴셜 센터 스카이워크에서 보는 보스턴 전경


2015/04/29 - [분류 전체보기] - 인상깊게 본 자바미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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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 읍참마속-泣斬馬謖


읍참마속(泣斬馬謖)은 한자어 대로 읍(업드리고)하고 울며 마속(馬謖)의 목을 베었다는 뜻이지만 ,이 한자어가 탄생한 연유를 알아보면 깊은 아픔이 느껴지는 고사성어임을 알 수 있다 .


촉나라(蜀)의 제갈량(諸葛亮)이 조조와 싸워서 이제막 승기를 잡고 중원 진출을 도모 하려든 때였다.

중요하고 큰 전투를 해야하는 시기에 후방이긴 하지만 중요한 군량수송로
(軍糧輸送路) 중에서도 요충지인 가정(街亭:한중의 동쪽지역)을 수비 해야 하는 것이 염려가 된다.

조조의 노장 사마의(司馬懿)가 이끄는 군대를 대적 해야하는 임무라서 신중을 기하려 한다.

당시 용맹하고 충성스런 젊은 장수 마속(馬謖)이 이곳을 지키겠노라고 간청한다.

제갈량은 영 맘이 놓이지는 않치만 목슴을걸고 지키겠노라고 간청하는 뛰어난 젊은장수 마속(馬謖)에게 임무를 맞기고 만다.


제갈량(諸葛亮)은 마속(馬謖)에게 전술대로 산기슭의 협로(峽路)를 가만이 지키기만 하라고 명령하고 떠난다.


그러나 의기충천한 마속은 적을 유인하여 역공해서 큰전과를 올리겠다는 욕심을 내어서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산 위에다 진을 친다.

유리한 고지에서 쫒기듯 하면 산기슭을 기어 올라오는 조조군대를 싸워 이긴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산위로 올라가서 진을 치고 기다리지만 노련한 사마의(司馬懿)가 산꼭대기로 마속(馬謖)을 잡으러 올라가지 않는다.

제갈량이 마속(馬謖)에게 지키라고 한 산기슭에 도리어 사마의(司馬懿)가 진을치고 산아래를 완전히 포위해 놓고 그냥 기다리기만 한다.

마속(馬謖)의 군대는 몇일도 못가서 식수가 떨어지고 병사들은 목말라 지쳐서 지리 멸렬 할 위기에 빠진다.

그때사 마속(馬謖)은 제갈량의 전술을 이해 했지만 늦었고 앉아서 죽을수가 없음으로 무리하고 위험한 탈출 전투를 벌려야했고 이 과정에서 마속(馬謖)자기와 병사 몇기만 살아남는 대패 를  하고 만다.

 

마속의 어이없는 전투 패배로 후방의 군량미 보급로가 차단되어 제갈량은 전군(全軍)을 한중(韓中)까지 후퇴 시키지 않을수 없어지고 자신도 마속에게 중책을 맡겼던 것을 크게 후회한다.

제갈량은 군율을 어긴 그를 참형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픈마음으로 
"마속은 정말 아까운 장수다."고 외쳤고.

사사로운 정 때문에 군율에 따르지 않을경우 마속이 지은 죄보다 더 큰 죄를 저지르게 된다는 생각으로 형을 집행한다.
특히 아끼는 사람일수록 법에 따라서 대의(大義)를 세워야 나라의 기강이 선다고 말한다.

  

마속(馬謖)이 처형장으로 끌려 갈 때 제갈량은 도포자락으로 얼굴을 감싸고 마룻바닥에 엎드려서 크게 울었는데 ,...


이 일을 후세 사람들이 너무나 가슴아프고 안타깝지만 벌을 줘야하는 제갈량의 일을 말 할때 읍참마속(泣斬馬謖)즉 울면서 마속을 처형했다 라고 표현하게 된다.

 

이 내용은 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이며 이 어처구니 없는 마속의 실수로 인해서 제갈량과 촉나라는 대 중원(中原) 진출을 포기 할 수 밖에 없어진다.


읍참마속 泣斬馬謖읍참마속 泣斬馬謖



제갈량이 아끼는 마속을 죽이는 심정에 비유해서 읍참마속-泣斬馬謖이란 한자어가 탄생한 것인데 가끔 그렇지 않고 법적 처리하면서 위로하는척 하기 위해서 읍참마속(泣斬馬謖)한다고 표현 한다면 잘못된 인용일 것이다.


읍참마속 泣斬馬謖읍참마속 泣斬馬謖



마속(馬謖)

중국 촉한의 장수, 자:유상
형주 양양군 의성현 사람. 제갈량의 신임을 받는 장수지만 가정 전투에서 명령불이행 참패해서
제1차 북벌을 수포로 돌아가게 한 책임을 물어 처형당함.이때 사랑하는 신하를 가슴아파 울면서 법대로 처단하여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뜻으로 읍참마속이 유래하게 된다. 


출생: AD 190년, 중화인민공화국 샹양 시

사망 날짜/장소: AD 228년

형제: 마량




2014/12/16 - [블로그일기/창작일반] - 방패연을 만들면서

2017/06/27 - [철학/문학/교양/상식] - 사마귀와 당랑거철(螳螂拒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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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오륙귀범(五六歸帆)


해운대 전래 민속놀이로 재현되고 있는 오륙귀범(五六歸帆)은 옛날 해운대지역 어부들의 생활상의 일부로서 현대에 재조명되어 발굴되고 민속놀이로 재현된것입니다.


오륙귀범(五六歸帆)은 먼바다에 나가서 고기잡이를 하고 돌아오는 어선들이 고기냄새를 맡으며 따라오는 갈매기들을 만선을 갈매기가 환영하는것으로 생각하며  오륙도를 지나서 해운대로 돌아오는 어선들의 풍경을 지칭하는 것이다.


정원대보름날 해운대 백사장에서 달집태우기를 하며 바다가 어두어질 즈음해서 어선들로 가장한 배들이 갈매기떼를 돈반해서 들어오는 모습은 장관이다..



#갈매기몰이 #오륙귀범 #해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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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오륙귀범(五六歸帆)SONY | ILCA-77M2해운대 오륙귀범(五六歸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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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동헌(東萊府東軒)은 동래 내성안에 자리잡은 유서깊은 곳으로서 조선시대 관아이지만 현대까지도 관공서로 사용된 특별한 곳입니다.


인조14년 1636년에 동래부사 정양필이 창건한것이며 1711년 숙종 37년에 동래부사 이정신이 관아건물을 충신당으로 편액을 붙인것이 조선시대 말기까지 관아의 동헌으로 사용되었던 곳입니다.


일제시기 이후 현대에는 동래군청 청사로 사용되었는데 동래군 이 행정구역이 바뀌어 양산군으로 편입되는 1973년에 양산군 보건소 동래지소로 사용되었던 곳 입니다.


이후 1977년 부산광역시에서 매입하여 초석 이상을 해체복원하여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동래부사 등 동래의 수령이 일을 처리하던 곳으로 지금의 부산광역시장 집무실과 비슷한 곳입니다.
2013년 5월 8일 지정명칭이 동부 동헌에서 동래부 동헌 충신당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동래부동헌(東萊府 東軒) 동래부동헌(東萊府 東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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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대(樓臺)와 동야월광(冬夜月光)
달빛아래의 누대

달밤에 부산 동래 칠산동 뒤의 내성에 올라서 때마침 누각의 처마밑에 달린 달사진
한장 찍었는데 황경인의 한시로 매칭시켜 봅니다.    


청빈문사의 마음이 표현된 한시 중에서 서정적으로 맛갈나서 좋지요.


누대(樓臺)와 동야월광(冬夜月光)누대(樓臺)와 동야월광(冬夜月光)



동야-冬夜
겨울밤 - 黃景仁-황경인-


空堂夜深冷  공당야심냉
텅빈 집에 밤이 깊어 너무나 썰렁해서


欲掃庭中霜 욕소정중상
마당의 서리라도 쓸어볼까 하는데


掃霜難掃月 소상난소월
서리는 쓸어져도  달빛은 쓸 수 없어


留取伴明光 유취반명광
서리와 밝은 달빛 함께하려 하노라


* 번역하며 사용한 표현은 개인적으로 다듬기 위해 사용해서 한자대로의 번역과
조금 거리가 있을수 있습니다*


黃景仁-황경인은 중국 청나라의 시인(1749~1783)이며 자는 중칙(仲則)이고 호는 녹비자(鹿菲子)로서 

당대 성당(盛唐)의 시를 배우면서 서정성이 뛰어난 작풍을 남긴다.
그의 저서에는 양당헌집(兩當軒集), 회존시초(悔存詩鈔)등이 있다.

그는 초년에 아버지와 형을 여읜후로 홀 어머니와 빈곤하게 살면서 詩文에 심취하고 일생을 유리방랑하며 청빈하게 살면서 지극히 감상적인 문장의 작품을 남긴다.


위의 시에 나온 한자풀이
空堂 : 텅빈집.  
夜深冷:차거운밤-쓸쓸한밤
留取 :잡아 둔다.  
伴明光 :밝은 달빛과 동반하여.

月明霜光:밝은달빛과 빛나는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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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龜堂) 남휘(南暉)와 정선공주(貞善公主)의 묘(墓).

행정구역으로는 경상남도 창녕군 부곡면 구산리 산1-2이며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얕으막한 산자락 양지바른곳에 분묘 3기가 있고 그아래 입구에는 비각이 세워저 있다.
풍수지리적으로도 명지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에 있는 남휘(南暉)와 정선공주(貞善公主)의 묘(墓)는 원래는 경기도 평택군 동천리 사후동에 있는 것을 의령남씨의 후손들이 1974년에 창녕군 부곡면 구산리 산1번지인 이곳으로 이장한 것입니다.

봉분이나 주변땅을 보면 그리 오래된 묘역이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정선공주(貞善公主)는 조선 3대국왕인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로 부터 태어난 민씨의 넷째딸이다.
서기 1404년 ~ 1424년 2월 25일(음력 1월 25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의산군 남휘(남재의 손자)에게 출가했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으며 21세로 아까운 생을 마감했다.

훗날 남이장군은 정선공주의 아들이라고 알려지기도 했지만 남이는 정선공주의 손자로 밝혀지고 있다.

정선공주의 가계

부 : 조선 제 3대 태종

모 : 원경왕후 민씨


시아버지 : 의령 남씨(宜寧南氏) 병조의랑(兵曹議郞) 남경문(南景文)

부마(정선공주의남편) : 의령 남씨(宜寧南氏) 의산위(宜山尉) 소간공(昭簡公) 남휘(南暉)

장남 : 남빈(南份)

손자 : 의산군(宜山君) 충무공(忠武公) 남이(南怡)

차남

장녀 : 대사성(大司成) 신자승(申自繩)과 혼인 - 고려 개국 공신 신숭겸의 후손



南暉(남휘). 貞善公主(정선공주) 墓(묘)

문화재지정 번호 : 도문화재자료 제236호 


남휘는 의령남씨의 칠세손이며 영의정 남재의 손자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와 함께 살며 효성 지극하고 인품이 출중해서 조정에까지 알려지고
태종대왕의 4녀인 정선공주의 배필이 되어 태종의 부마가 된것이다. 

당시 한양에서 경상도땅 의령의 인재를 천거 할 만큼 출중한 인물이었음을 유추 할 수 있다.

남휘(南暉)는 누구인가.


이름:남휘(南暉) 본관(本貫):의령(宜寧)  호(號):구당(龜堂)
남휘(南暉)는 의령남씨 7세손이다.
영의정을 지낸 南在(남재)의 손자이다.
남휘(南暉)는 남이장군의 祖父(조부)이다.

 

효심과 인품이 뛰어나다는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태종의 4녀인 정선공주와 결혼하여 駙馬都尉(부마도위)가 되었다. 

 

남휘는 세종때 선위사를 4차례역임하고,

유후사를로7차에 걸쳐 활동했다.
이후 세종 18(1418)년에 보국숭록대부 의산군(輔國崇祿大夫宜山君)으로 관직을 제수받는다.

그후 단종 2년에는 소간(昭簡)의 시호를 받았다.


세종 7년(1425) 평양선위사(平壤 宣慰使로)나갔으며 

1426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28년에 대간(臺諫)들의 탄핵을 받아 이천(利川)에 부처(付處)된후 이듬해 석방된다.

이후 1433년 황주선위사(黃州 宣慰使)로 이듬해엔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를 다녀온다. 

 

남휘(南暉)는 불자(佛者)로서 불심(佛心)이 깊어 불상(佛像)을 만들었고 이를 이유로 문종 2년(1452)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왕이 처벌을 불허하여 무사했다.


*주해 :
유후사(留後司).


조선(朝鮮)초엽(初葉)에 한양을 도읍으로 삼았을때 두고온 구도 개성(開城)을 통치(統治)하기 위(爲)해서 만든 지방(地方) 행정(行政) 관청(官廳).
수도를 한양(漢陽)으로 옮긴 후(後)에 많은 뒤처리(-處理)를 해야하는 중요한 관청(官廳)이었다.
원만히 수습이 된후에는 
유후사(留後司)를 개성부(開城府)로 개칭하여 관청으로 남는다.

사은사(謝恩使)
조선(朝鮮) 시대(時代) 때 나라에 베푼 은혜(恩惠)에 감사(感謝)한다는 뜻으로 외국(外國)에 보내던 사신(使臣)



문화제지정


지정년월일 : 1997. 1.30

문화재시대 : 조선초기 (1404~1455년)

규 모 : 면적 5,000㎡

수 량 : 묘 2기(석물 14점)

담당행정구분:창녕군청 : 055)530-1000,창녕군 생태관광과 : 055)530-1531

남휘(南暉) 신도비각(神道碑閣)

 


남휘(南暉)와 정선공주(貞善公主)의 묘(墓)전경

남휘(南暉)와 정선공주(貞善公主)의 묘(墓)전경SONY | DSLR-A300남휘(南暉)와 정선공주(貞善公主)의 묘(墓)전경

보는바와같이 현재 묘역은 쌍분으로 나란이 배치되어 있고 다듬은 둘레석으로 감싸고 있다. 

묘비와 망주석 등의 석물들은 옛날 묘역의 대부분의 모습과 같다.


오른 쪽이 정선공주(貞善公主)의 분묘(墓)이고 왼쪽이 부마 남휘(南暉)의 분묘이다.



정선공주(貞善公主)의 비석SONY | DSLR-A300정선공주(貞善公主)의 비석 남휘(南暉)의 비석SONY | DSLR-A300남휘(南暉)의 비석


남휘(南暉)와 정선공주(貞善公主)의 묘역 석물SONY | DSLR-A300남휘(南暉)와 정선공주(貞善公主)의 묘역 석물


 남휘(南暉)와 정선공주(貞善公主)의 묘(墓)전경SONY | DSLR-A300남휘(南暉)와 정선공주(貞善公主)의 묘(墓)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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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어머니를 만난 이야기의 주인공
동래부사 유심(東萊府使 柳沈)의 애틋한 이야기


전생어머니를 만난 실존지역 동래성 내성지구는 지금의 칠산동이나 수안동 부근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배경으로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동래부사 유심 선정비(東萊府使 柳沈 善政碑)가 옮겨저서 지금은 부산박물관 뜰에있는데 맘먹고 찾아서 사진을 찍어 왔습니다.


동래부사 유심(東萊府使 柳沈)의 선정비를 보면서 역사적인 이야기를 재 편집 해 봅니다.

동래는 부산을 대표하는 옛날 동래부의 중심지로 동래부 관아에 얽힌 이야기들은 이 외에도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실존 인물로서 선정을 베풀어 그의 선정비가 잘 남아 있는 동래부사 유심 이야기는 전래동화처럼 구전되어 내려오면서 많은 각색이 있어 비슷비슷한 것들이 많지만 바로 이곳 동래가 그 진원지입니다.


유심(柳沈)의 선정(善政)비는 조선 중엽 동래부사를 지낸후 제작된것으로서 기록이 잘 보존된 자료이며 석물은 부산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지만 자세히 보지 않을 뿐입니다.
  

이 비석의 당사자인 유심(柳沈)에 대한 이야기는 동래 내성 안에서 일어난 실제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더 실감나며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나이 든 분들은 많이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실존인물 동래부사 유심이야기인줄은 모릅니다.

사람이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는 하나의 설을 증명하는듯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이룬 내용과 지극한 염원에 대한 보상 같은 것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동래부사 유심 선정비(東萊府使 柳沈 善政碑)SONY | DSLR-A300동래부사 유심 선정비(東萊府使 柳沈 善政碑)

이 이야기는 조선 중기 어느 봄날 동래부사가 행렬의 앞뒤에서 악사들이 연주를 하며 환영하는 화려한 부임행차를 하면서 내성 안으로 들어옵니다.


성내 주민들은 너도나도 새로 부임하는 부사의 행차를 구경하러 길가를 메우는 시끌벅쩍한 날이었습니다.

이날 성내 가난한 산비탈 동네에 남편을 일찍 보내고 어린 아들과 단둘이 사는 한 젊은 과부도 아들의 손을 잡고 구경하는 사람들의 틈새에 나와 있었습니다.

그 아낙은 당시 네살배기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성숙되고 잘생긴 얼굴에 총명한 어린 아들을 의지하며 살았드랍니다. 


성대한 환영 행사의 주인공은 늠름하고 당당하게 큰 말을 타고 화려한 의관을 입고 고을의 백성들을 두루 내려다보며 마침내 과부와 어린 아들의 앞을 지나갑니다.

지금도 동래의 향토 민속은 전국적으로 유명한데 그 역사는 조선 시대로 또는 더 이상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날도 새로 부임하는 환영 행사는 동래 명기(名妓)들의 팔선녀(八仙女), 대군(大軍 ) 등의 놀이로 흥을 돋우며 말을 타기도 하면서 행사는 고조됩니다.

이런 성대한 행사 때는 동래 주민뿐만 아니라 이웃 고을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 와서 환호하는 잔칫날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좋은 행사의 주인공인 신임 동래부사를 바라보던 이 어린 아이는 갑자기 또렷하고 자신 있게 "어머니, 나도 커서 저렇게 훌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가난한 엄마는 아들에게 할 말을 잊었습니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 가슴이 미어지는 심정으로 총명한 아들에게 힘없는 목소리로 "너는 그렇게 될 수 없단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총명한 아이는 다그치며 끈질기게 그 이유를 묻기 시작합니다.
“어머니, 왜 저는 커서 어른이 되면 저렇게 될 수 없습니까?"라고 시작해서 마침내 슬픈 어머니의 목소리로 하는 천출은 벼슬을 할 수 없는 이유까지를 듣게 되었습니다. 


어린 아들이 스스로 천민으로 태어나서 이 세상에서 희망이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벼슬은 천민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이며 아직 체념해야 하는 나이가 되기도 전에 알고 만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실망과 좌절이 어린 가슴을 짓누르게 되고 어린이는 감당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울다가 지쳐서 쓰러지고, 또 깨어서 울다 지치기를 반복하며 음식도 먹질 않다가 아이는 그날부터 시름시름 원기를 잃고 얼마 뒤에 병을 얻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삶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아들이 과부에게서 떠나고 슬픔과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꿈속에서 죽은 아들을 만났습니다.

“어머니! 너무 슬피 울지 마세요. 저는 한양에서 재상을 지내는 유씨 가문에 태어나서 잘 살고 있답니다."
"어머님, 이젠 부지런히 공부하면 벼슬도 할 수 있으니 걱정 마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날은 밝았습니다. 


세월은 흐르는 강물처럼 슬픔도 좌절도 함께 가져가고 강산이 몇 번이나 바뀐 후에 과부도 백발 노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의지하던 아들을 잊을 수는 없었으며 아들의 제삿날엔 정성껏 제사상을 차려놓고 그때를 생각하며 아이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통곡을 합니다.

울면서 “내 아들아 많이 먹어라. 네가 좋아하는 음식을 차려 놓았단다.” 하고 밤을 지새우곤 합니다. 

  

한양의 유씨가문에서 총명하게 자라는 유심은 이상하게도 매년 같은 날 밤에 꿈속에서 어느 초라한 초가집에 들어가게 되며 거기서 어떤 제사상을 받고 음식을 잘 먹곤 합니다.

유심은 양반가의 훌륭한 도령으로 성장해서 나라에서 치르는 과거에 당당히 급제한 후 마침내 오늘 동래부사로 부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동래부사 유심은 처음 받은 관직으로 처음 오는 남쪽 끝의 동래 땅에서 환영을 받으며 간간이 바라보는 노변이나 풍경이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았음을 느끼게됩니다.

언젠가 어느 날 꿈속에서 와 본 적이 있는 그런 느낌말입니다. 

  

부임 후 따뜻한 어느 봄날 복사꽃 흐드러지게 핀 부임 첫 생일을 맞았습니다.
지금도 생일을 맞은 사람에게 특별 배려를 하듯이 부사도 생일날 한가한 마음으로 내성을 한 바퀴 돌다가 문득 낯설지 않은 비탈길 동네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떠오르는 꿈속의 그 집이 생각나서 곧 유부사는 관아의 한 평인과 함께 자세한 동네의 내력을 물은 뒤 꿈속에서 본 길을 마침내 찾아 나섭니다. 


동래부사 유심 선정비(東萊府使 柳沈 善政碑)SONY | DSLR-A300동래부사 유심 선정비(東萊府使 柳沈 善政碑)


해는 뉘엿뉘엿 어느덧 어둠이 깔리는데 부사는 무언가에 홀린 듯 누구에게 이끌리듯 길을 걷습니다.

조금 후에 나타난 길은 언제나 다니던 길같이 익숙한 비탈길입니다.


이윽고 꿈속에서 보던 기울어진 작은 초가집을 만납니다.

초가집에서는 너덜거리는 문틈 사이로 희미한 호롱불이 보이고 반쯤 열린 방문 사이로 백발 노파가 제사상 앞에서 흐느끼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간 유부사는 마음을 가다듬고 자기가 부사라고 밝힌 후 백발 노파에게 정중히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물어 봅니다. 


"노인은 누구 제사이길래 이리 슬피 우시는지요?" "본디 일찍 청상이 되어 아들 하나를 의지하며 살았는데 그 어린 것이 꿈도 못 펴 보고 4살 먹은 해에 떠났답니다.

오늘이 그 불쌍한 내 아이의 기일이라서 혼이라도 불러볼 요량으로 생전에 좋아하는 음식을 차리고 보니 복받치는 설움 때문에 운답니다."

유 부사는 그제야 오늘이 자신의 생일이라는 것이 떠오릅니다.
노파의 말은 계속되고, 아이가 죽은 후 얼마 뒤에 '꿈속에서 한양 유씨 가문에 태어났다고 했었습니다.' 까지 말하게 됩니다. 

  

여기서 부사는 온몸에 전율이 흐르고 이 노파가 바로 전생의 자기 어머니였음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는 일어나서 늙은 어머니 앞에 큰절을 올리면서 말했습니다.

“어머니 많이 기다렸습니다. 4살 때 어머니를 두고 떠난 그 아들이 이제야 돌아왔습니다.”
하고 유부사도 한참을 울었읍니다.

전생의 모자(母子)였음이 확인된 두 사람은 회한과 사랑으로 잡은 손을 놓지 못하고 목놓아 울어야 했습니다. 


이후 부사는 동래부에서 떠날 때까지 전생의 어머니를 위해 지극한 예를 갖추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어 노파는 여생을 편히 살았읍니다.

아울러 동래부사의 백성 사랑은 전생 어머니 대하듯 해서 노인을 공경하며 선정을 베풀어 동래부를 떠나는 날 동래 성내 백성들이 환송하며 세운 선정비가 지금도 보존되고 있으며 부산 박물관에 귀한 자료로 보관되고 있습니다. 


전생의 어머니를 직접 상봉한 이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회자 되어 전해 오지만 역사적인 기록물과 증거들이 있는 동래부사 유심 이야기가 오리지널이며 다른 지역의 유사한 이야기들은 파생된 설화임을 밝힙니다. 


동래부사 유심 선정비(東萊府使 柳沈 善政碑)SONY | DSLR-A300동래부사 유심 선정비(東萊府使 柳沈 善政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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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시립박물관에 있는 '동래부사 유심 선정비(東萊府使 柳沈 善政碑)'는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 유심선정비는 1649년(효종 원년) 11월부터 1651년(효종 2) 7월까지 동래부사를 역임한 유심(柳沈)의 선정비입니다. 

동래부지의 기록에 의하면 동래부의 7개 면에 모두 선정비가 세워진 동래부사로는 유심이 처음인데, 이는 유심이 동래부사에서 바로 경상감사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며 그의 선정비는 상투적으로 떠날때 만든 것이 아니며 정말로 칭송할만했다고 생각됩니다.


이글은  본인의 글<시니어리포터 정주호>

http://www.yourstage.com/newsinfo/lifeview.aspx?thread=78250 을 사진 보충해서 재편집 한 것이며 남의글을 불펌한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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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 역사유적-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



-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부산동래 금강공원내에 있는 역사유적.

부산시 지정기념물 제 13호


부산 동래의 금강공원을 가면 얼핏보기에 사찰같이보이는 아늑한 장소가 있다.
특히 바로 인접해서 금정사라는 사찰이 있어서 더욱 그런분의기가 나기도 한다.
입구의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서 있어 쉽게 알아볼수 있다.

금정사 옆의 동래부사들의 선정비가 쭉 늘어선 입구를 지나서 운치좋은 솔밭길로 들어서면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을 만난다.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SONY | DSLR-A300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


이곳이 있기까지의 그때를 간단히 회고하면 때는 1592년 임진년 선조 25년 오전에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수많은 군선과 함께 부산진첨사 정발이 지키고 있던 부산진성을 공격하고 함락시킨다.


이미 소식을 들은 동래부사 송상현은 죽기를 각오하고 전투준비에 임했다. 

인근 지원군도 속속 도착하고 전투준비를 했으나 워낙 중과부족으로 어려운 전쟁임을 알지만 동래성의 민관군은 일심 단결했다.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여세를 몰아 고니시 유키나가는 동래성에 도착하자 성 앞에서 병력을 과시하며 戰則戰矣 不戰則假道 -전즉전의 부전즉가도- 즉 "싸워 보고싶다면 싸우고 싸우기싫다면 길을 비켜라" 라는 오만한 글을 전투를 하기전에 송상현에게 깃발에 달아서 보여주며 시위한다.


자기들이 남의 땅에서 지나갈테니 무력을 앞세워서 길을 비키라는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송상현은 왜군이 한반도에서 저지를 노략질을 잘 알고 부산 동래성을 죽기로 사수할 결심을 하며 戰死易假道難 - 전사이 가도난- 즉 "죽기는 쉬워도 길을 열기는 어렵다"라는 글귀를 성루에 내 걸었다.


곧 양 진영은 전투로 돌입하게 되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데 이것이 임진왜란의 서막인 동래성 전투이다 . 

동래성전투는 초반에는 송상현이 방어 준비를 워낙 잘 해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쉽게 점렴하지 못하고 한때 후퇴했지만,곧  병력을 재투입해서 전투가 계속되며 송상현은 극심한 전투력의 중과부족으로 궁지에 몰리며 성안의 백성들까지 힘을 합쳐 조총앞에서 돌맹이를 던지는 지경까지 가는 혈전속에서 고귀한 충절을 보여주며 최후를 마친다.


이로서 임진년 왜구들의 침략전이 한반도 전체를 유린하며 암담했던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시작된것이다.


송상현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부채에있는 자신의 아버지인 사헌부 감찰 송흥복에게 편지를 써 보내고 조복을 갈아입고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서 북향사배를 올린다. 


동래성은 함락되고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장수 송상현에게 크게 감동하며 적장을 자신의 가족처럼 예를 다해서 극진한 수준의 장례식을 치루었다. 

부하들에게는 송상현의 충직함을 본받으라고 훈시한다.


송상현은 사후 이조판서 찬성으로 추증되었으며 그분의 영구는 현재 동래 안락서원(安樂書院)과 충렬사에 모셔저서 제향되고 있다.


***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 ***

이때 관군은 말할것도 없고 이름없는 백성들이 의연하게 일어나 동래읍성을 지키려는 전투에서 수많은 순사(殉死)자를 내는데 이 때 순사(殉死)한 성민들의 유해를 거두어 만든 무덤을 본래장소에서 몇번 옮겨 현재의 장소 동래금강원에 안치한곳이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 즉 부산시(도)기념물 제13호 이다.


기록에 의하면 1731년 영조 7년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허물어진 동래읍성을 수축하다 임진왜란 격전지 남문터(지금의 수안로타리)에서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의 유골을 발견하고 이 유해를 거두어 함에 안치해서 삼성대(三姓臺)의 서쪽 산기슭 현재 내성중학교 부근에 여섯개의 무덤으로 만들고 안장했다.

그리고 '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이라는 비석을 세웠다.


관에서는 소요되는 제전(祭田)을 지급하여 동래향교에 맡겨서 매년 추석에 유생들이 제사를 모셨다.

그리고 전쟁발발일을 순절일로 하고 제사를 모신다. 

일제말기에 토지개간으로 무덤이 파괴되고 현재 복천박물관 부근 복천동 뒷산 영보단(永報壇)부근으로 이장하였다가 1974년 금강공원 내 현재의 자리에 한개의 무덤으로 만들어 봉안하고 있다.


현재 동래구와 동래문화원에서 이 분들이 순절하신 매년 음력 4월 15일에 구민들의 정성으로 제향을 일체를 봉행한다.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SONY | DSLR-A300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SONY | DSLR-A300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SONY | DSLR-A300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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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傳燈寺)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

이 아름다운 가을에 방문한 


광화도 정족산성(鼎足山城)내 전등사(傳燈寺) 경내 뒤켠에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가 있다.

지금이야 광화대교가 있어서 육지와 다를바 없이 교통이 좋지만 그옛날 광화도는 가깝지만 쉽게 갈수없는 요새라는 점에서 사고(史庫 )를 비치할 만한 장소였을것이다.

실제로 여기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에 보관된 실록이 지금도 내려오고 있는것을 보면 여기에 보관한것은 현명한 결정이었음을 보여준다.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SONY | DSLR-A300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SONY | DSLR-A300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



사고(史庫)는 말 그대로 역사서를 보관하는 창고인것이다.

우리조상들은 역사의기록을 중요시해서 고려때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 까지 나라의 역사는 물론 중요한일이나  서적이나 문서들을 철저히 보관했으며 이를 함부로 다루지 않고 국토내의 오지나 섬등의 몇곳으로 분산해서 정본을 복사 제본하여 견고한 전각을 통풍 벌레등을 고려해서 과학적으로 지어서 보관했다.

처음사고는 
고려가 개국을 하면서 나라에 사관이라는 직책을 두고 실록을 편찬했다.
그러나 고려사는 거란이 침입해서 전부 소실되었으며 이후 고종시대 1227년부터 복사본을 만들고 개경 이외에 한부를 해인사에 보관한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역대의 왕조실록을 별도로 보관했는데 이곳을 사각(史閣)이라 했으며 그 보존에 애쓴것을 볼수 있다.이것이 실록이 처음 사찰에 보관되는 역사이며 고려 1227년 고종 14년의 일이다.
고려 왕실이  최초로 합천 해인사에 별도로 사고를 마련하여 보관함으로서 우리의 역사가 사찰과 함께 존재하게 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궁궐내 춘추관과 충청도 충주,경상도 성주, 전라도 전주에 사고를 분산 설치했다.
이것을 춘추관 외에 3곳에 분산 보관한 충주사고,성주사고,전주사고를 말할때 3대사고라고 한다.

임진왜란을 당할때 안타깝게도 춘추관,충주사고,성주사고는 소실되고 전주사고만 다행이 화를 면하고 보존되었으며 그 실록과 문서들을 한때는 내장산으로 옮겨 보관했다.

1606년 선조 39년에서 명종대 까지의 실록이 복사 복원되어서 묘향산사고를 설치하고 전주 사고본을 옮긴것이다.
이때 오대산과 태백산과 적상산에도 동시에 사고를 마련하여 새로 간행된 실록들을 보관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강화도 보관은 1628년 인조 6년에 강화도 마니산에 새 사고를 설치하는데 묘향산사고의 원래 전주본을 옮긴다.이후 1660년 현종 1년에  강화 정족산에 사고를 마련하고 마니산사고에 있던 전주본이 이곳에 보관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정족산성 전등사 정족산사고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역사를 지금까지 전하게되는 소중한 곳이다.

구한말 1908년에 관의 체제가 바뀌면서 역사서들을 규장각이 관할하면서 정족사고,태백사고,오대산사고,적상산사고를 칭하는 4대사고의 장서들이 전문적으로 규장각이 관리하게 된다.

이 규장각 관할은 지금도 이어 온다고 볼수 있으며 오늘날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고 규장각이 관리하고 있다.서울대학교가 국립대학교임으로 지금도 조선시대 나라의 규장각이 대한민국정부로 이어오고 있다고 볼수 있다. 


인류의 그 어떤 나라도 가지고 있지 않은 방대하고 극히 디테일하게 쓰여진 우리의 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은 지금까지 전해 올수 있게되었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엄청난 수난을 겪으면서도 복사하고 또다시 분산배치하면서 역사의 기록과 교훈을 생명처럼 지켜낸것이다.
이를 지키기위해 우리 선조들이 노력한 정성과 지혜는 오늘날 우리들이 대하는 문화재를 생각할때 부끄러운일이기도 하다.


현재 있는 전등사 경내의 정족산사고는 1931년 즈음에 없어젔으나 다행이 주춧돌과 계단석이 남아있었으며 사고에 걸려 있던 ‘장사각’이라는 현판과 ‘선원보각’이라는 현판이 전등사가 보존하고 있어서 당시의 실상을 알수 있으며 이를 토대로 장사각 건물은 1999년 복원될수 있었고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세계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은 한 왕조의 역사적인 기록으로는 세계 최고로 긴 시간에 걸쳐서 작성된 세밀한 기록이다.
이 기록은 국왕의 치적에 있어서 공과 과를 사실대로 기록한것이 돋보이며 백성들의 삶에 관한 부분까지도 기록되어 당시의 생활상을 지금도 유추할수 있는 살아있는 역사서이다.

더욱이 이 역사서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도 활자로 인쇄되어 그 복사본까지도 신뢰성이 뛰어난 사서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왕조실록을 1973년 12월 31일에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10월 1일에는 세계가 인정해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된 것이다.


오늘방문한 정족산성내에 있는 전등사는 오래된 불교사찰이지만 불사를 봉행함과 동시에 사실상 오대산 월정사처럼 조정이 사찰의 힘으로 사고를 지키고 관리하려고 했던 중요한 임무를 주었으며 이를 수행하고 온 사찰이라고 볼수 있다.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SONY | DSLR-A300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SONY | DSLR-A300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


이 아름다운 가을에 방문한 

전등사(傳燈寺)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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