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사지와 문무대왕 수중릉
아름다운 감포에서 보는 감은사지와 문무대왕 수중릉
아침 해가 떠 오르는 동해 바다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감포항을 걷습니다.
아담한 감포항을 걸어서 문무대왕 수중릉이있는 봉길 해변까지 갑니다.
멋진 해변의 백사장엔 갈매기 천지입니다.
문무 대왕암을 호위라도 하듯이 갈매기 떼가 춤을 추며 대왕암을 휘돌아 날아 다닙니다.
많은 해변을 다녔지만 이곳 봉길해변 문무대왕암 앞 바다처럼 많은 갈매기떼가 기승을 부리는 곳은 없을 것입니다.
완전 갈매기 천지입니다.
모르긴 해도 해변에서 치성 들이는 사람들이 이곳만큼 많은 곳은 없을 것이며 그 것때문에 먹을것들이 풍부해서 일것입니다.
치성들이는 사람들이 많은것 또한 문무대왕 수중릉과 관계되는 또 하나의 현상 일 것입니다.
봉길 해변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아침 풍경입니다.
해변의 어느 업소 앞 마당이 너무나 감성적 분위기입니다.
사실 뚜꺼운 웨투를 입고 가는 차가운 겨울 아침이지만 분위기 만큼은 따스한 느낌을 주는 감성적인 풍경입니다.
먼저 보는 감은사지 쌍둥이 탑입니다.
봉길해변에서 잠시 머문후에 찾아간 감은사지 석탑이 아침 역광으로 보는 실루엣이 예술적으로 보입니다.
문무대왕 수중릉 전경입니다.
이땅에서 문무왕은 삼국통일이라는 전무 후무한 대 업적을 남긴 신라 제 30대 왕입니다.
유언으로 남긴 내용 대로 시신을 불교식으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안장한 장소입니다.
생전 문무 대왕의 의지대로 사후에 용이 되어 침입해 들어오는 왜구를 막는데 일조 했는지는 모르지만 죽어서도 나라를 위해 국방을 튼튼히 하겠다는 정신에 숙연해 집니다.
문무왕(文武王)은 626년~681년 7월 21일 (음력 7월 1일))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칩니다.
신라 제30대 왕으로서 재위 661년 (음력 6월 ~ 681년 음력 7월 1일)이지요.
문무왕은 재위 21년(681)에 사망했다. 신문왕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서 장사 지낸 것입니다.
갈매기 떼가 문무대왕 수중릉 앞을 퍼레드라도 하는것 처럼 날아 갑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봐서 그런진 몰라도 바닷가 여느 바위와는 좀 다른 모습으로 보입니다.
이 부근엔 저런 바위가 없고 딱 저 한 무더기의 바위섬이 있습니다.
대왕암을 배경으로 갈매기들이 춤을 춥니다.
수많은 갈매기들이 울어대어 시끄럽고 퍼드득 거리며 달려들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대왕암을 뒤로하고 잠시 황량한 벌판을 지나서 감은사지에 도착합니다.
감은사와 문무대왕 수중릉은 한 셋트로 이루진 문화재입니다.
문무왕은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문명왕후(김유신의 둘째 누이)의 맏아들로 태어난 김법민(金法敏)입니다.
668년에 고구려를 정복했으며 신라에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고 한반도 전 지역을 뺏으려 했던 당나라의 군대를 이른바 나-당 전쟁에서 승리하고 676년에 삼국통일을 이룹니다.
우리민족의 역사적으로 볼 때 가장 큰 영토적인 업적을 남긴 왕입니다.
문무왕의 왕후는 파진찬 김선품의 딸 자의왕후입니다.
감은사 터입니다. 감은사지 라고 부르지요.
감은사
불교 국가 신라 문무왕은 부처의 힘을 얻어 왜구를 격퇴하고자 절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 2년(682)에 완공되었습니다.
이 사찰은 당시 바다와 연결된 것으로 확인되며 수중릉에서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한 수로가 법당 밑 까지 연결된 것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은 속명 김정명(입니다.
문무와의 장자는 개요(開耀) 원년인 신사년(681) 7월 7일에 왕위에 오릅니다.
선대 부왕인 문무대왕(文武大王)을 위해 지극한 마음으로 동해 바닷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한 것으로 나옵니다.
문무왕 생전에 왜군을 퇴치할 목적으로 짓기 시작했지만 완공 못했으며 그 장자 신문왕이 개요 2년에 공사를 마친 사찰입니다.
문무 왕의 유언에 따라 유골을 수중 장 한 곳이 대왕암(大王岩)이며 유지를 기리기 위한 절은 감은사(感恩寺)입니다.문무왕 사후 용이 모습을 나타낸 곳이 있는데 그곳 이름은 이견대(利見臺)라고 부릅니다.
감은사 터만 남아있지만 역사적인 스토리를 음미하면서 아무도 없는 겨울 아침 사지를 돌아보는 느낌은 신선하고 좋습니다.
문무왕의 지미있는 출생 이야기
신라 때 어느 날 김유신의 맏누이인 보희(寶姬)가 꿈에서 서형산(西兄山) 꼭대기에 올라 앉아 소변을 봤는데 그 소변이 신라 전부를 흘러 넘쳤다지요.
아침에 잠에서 깬 뒤 동생 (후에 문명왕후)에게 꿈 이야기를 하게되고 문명왕후는 범상치 않은 꿈임을 느끼고서 언니에게 꿈을 팔라고 해서 비단 치마 하나를 주고 꿈을 사게됩니다.
그 며칠 뒤에 오빠인 김유신이 김춘추(金春秋 :뒷날 태종무열왕)와 축국(蹴鞠 :짚으로 공을 만들어 차는 사내들의 놀이 경기)을 하다가 김춘추의 옷고름을 떨어뜨렸답니다.
김유신은 김춘추를 데리고 와서 식사를 하면서 맏누이인 보희에게 김춘추의 옷 고름을 달아 줄것을 요청했지요.
그때 하필 보희는 바쁜 일로 나오지 못하고 동생이 대신 나와서 바느질로 옷고름을 달아 줍니다.
김춘추는 즉석에서 반하게 되고 곧 정식으로 청혼을 해서 결혼하게 됩니다.
그녀가 낳은 아들이 바로 뒷날 문무왕이 되는 김법민(金法敏)이랍니다.
** 주**
서형산은 지금의 서악리 무열왕릉 뒤편의 선도산으로 추측하는데 맞는지는 모릅니다.
근거 : 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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