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연군묘(南延君墓)와 풍수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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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제왕지 남연군 묘(南延君墓)를 탐방하고.

남연군(南延君)은 아래 도표에서 처럼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의 후손입니다.
조선사를 보면 1815년 순조 15년에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넷째 아들인 은신군(恩信君)의 양자로 입적해서 계보가 바뀌어 진 것입니다.

 

남연군묘(南延君墓)는 현재 관광지이기도 하고 풍수 지리적으로 유명해서 많은 지관들이 답사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 남연군묘(南延君墓)는 흥선대원군의 친부인 남연군 이구(1788∼1822)의 묘지입니다.

행정 구역으로 보면 남연군의묘(南延君의墓)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있는 조선 시대 묘지입니다.
1989년 12월 29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남연군묘
남연군묘

당시 한 나라가 안동 김씨의 세도 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역사적인 시기에 왕족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切齒腐心)하던 대원군 이하응이 풍수지리설에 매료되어 가장 빠르게 권력을 차지 할 방법으로 천하 명당을 수소문 하고 있었답니다.

흥선군 이하응은 당시 안동 김씨들의 세도에 대한 복수와 권력 쟁취의 일념으로 자신을 낮추고 위장하며 안으로 칼을 갈던 대단한 인물 이었다고 알려지비니다.

그는 스스로 10년 간이나 풍수 지리를 공부해서 수준급 안목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명당지를 찾고 있던 때입니다.


왕권을 회복하고 정권을 되찾는 가장 빠른 방법은 명당 자리에 아버지의 묘를 이장해서 빠른 발복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당시 유명하다는 지관은 두루 찾아가 물어보고 명산 명지를 찾던 중에 정만인(鄭萬仁)이라는 지관이 스스로 찾아와서 좋은 장소를 알려주게 됩니다.

 

덕산 가야산 동쪽에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오는 자리를 알려줬으며 동시에 광천 오서산 자락에 만대에 걸처서 부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만대 영화 지지(萬代榮華之地)가 있다고 알려 줬답니다.

 

개인적으로 나라면 자손 만대에 부귀영화를 누릴 장소를 택하겠습니다 만, 홍선군의 입장에서는 절대권력 외에는 생각 할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는 절대 권력을 이용해서 자손 만대에 권력을 유지 할 수 있는 탄탄한 세력을 구축 해 놓으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뭏든 흥선군은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를 선택했답니다. 

2대에 걸쳐서 임금이 나온다는 명당이라는 곳이지요.

 

그 자리에는 이미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있었고 묘를 쓸 핵심 자리에는 5층 석탑이 서 있었답니다.

홓선군 자신도 풍수 지리에 대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잘 알기 때문에 천하 명지 임을 즉시 알아 봤을 것이며 ...

함게 한 지관 정만인이 "이곳에 조상을 모신다면 십 년 안에 제왕이 날 것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흥선군은 허허 "어쩌면 영의정 하나 쯤 나겠소."라 고 했다고 전해오는 일화가 있습니다.


당시에 왕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제왕 지지에 산소를 쓴다면 큰 죄가 될 테니까 말입니다....
말 한마디 까지 얼마나 주도 면밀한 성품 인지를 보면 제왕을 만들고도 남을 인물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왕지지(帝王之地)에 묘를 썼다는 소문이 나지 않도록 철저히 조심 했다는 한 부분입니다.

 

풍수 지리에 심취한 대원군 이하응은 2대에 걸쳐서 임금이 나올 자리라는 것을 믿고 경기도 연천에 있던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옮긴 것입니다.
절대적인 믿음으로 이곳에 이장을 하는데는 많은 노력과 금전이 투입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며 역사를 진행 한 것입니다.

따라서 정말 명당자리의 지기를 받아서 발복을 했는지 그 사람의 지극한 염원과 주도 면밀한 노력과 집착의 결과인진 모르지만 절대 권력을 찾고 조선 시대를 통 털어서 보기 드문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인물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가야사
가야사

그 옛날 번성했다가 남연군 묘를 쓰기 위한 일 때문에 멸망했다고 하는 그 가야사지 인지는 모르지만 너른 가야사 뜰을 거닐어 봅니다. 큰 정자 나무가 있는데 수령이 꽤 오래되어 보이긴 하지만 가야사가 번성했던 그 때의 나무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바라 봤습니다.

남연군 묘 답사
남연군 묘 답사

가야산 정상까지 답사하며 우측 연못가에서 가야산을 배경으로 인증샷 한장 남깁니다.

 

가야사
가야사


원래 이곳에 있던 가야사라는 절은 망했으며 대원군 이하응이 이장을 한지 정확히 7년 후에 차남 명복이 태어났습니다.

후에 그는 철종의 뒤를 이어서 1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며 그가 고종 임금입니다.

현재 역사를 놓고 본다면 일생 일대의 역사와 처절한 풍수 지리에 대한 믿음처럼 그 발복의 에너지에 의해서 권력이 정말로 탄생했다고 한다면 개인적으로 이곳이 명당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 일까요?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이 이후 어떻게 변해 가는 지를 생각해 본다면 결코 명당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잠시 생각 해 본 개인적인 생각이었고요..^^

 

실제로 이곳에서 가야산을 바라보면 교과서 적인 풍수 지리의 기본에 아주 잘 맞는 지형을 가진 곳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좌 청룡 우 백호라는 기본이 잘 되 있긴 하지만 지금 보아도 청룡이 쎄게 보입니다.

그래서 여세(勢가 만만 찮았다고 한다면 끼어 맞추기가 될 지 모르겠습니다.  

 

당시 대원군과 정만익이 가야산 정상에까지 가 봤는지는 모르지만 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경관은 좋았습니다.

그 때도 저 아래 연못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비교적 큰 습지나 물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그래야 이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연군_홍성대원군_고종계보
남연군_홍성대원군_고종계보

 

그러면 무었 하겠습니까 ?
권력은 떠나고 나라는 끝장나고 역사에 이름 또한 떳떳하지도 못한데...

잠시 한 나라를 마음대로 했지만 그 막강한 권력으로 국력을 반석 위에 올리고 열강들이 세계를 순회 하는 시점에 보다 현명한 대처를 할 방법은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천하 명당 때문에 죄 없이 망한 가야사에 대한 보답으로 보덕사라는 절을 다시 지어 주었다고 하는데 자기 체면 때문에 한 일 만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 해 봅니다.

 

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에 집착하면 반드시 얻긴 하지만 그 끝은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알게 됩니다.
어떤 권력에도 편승하지 않고 유구히 살아 남아 자자손손 영화를 누릴 수가 있다면 권력보다 더 갑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지금도 유명한 분들이 명당에 대한 믿음으로 큰 노력을 기울이고 명당에 묘소를 짖는 것을 알게 되지만 짧은 인생 중에 참기 힘든 수모를 겪고 있는 것을 종종 보면서 허무한 마음 가눌 길 없습니다.

 

 

 

 

 

남연군묘 전경
남연군묘 전경
남연군묘 비석
남연군묘 비석

    

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의 사실
 

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는 1788년 8월 22일 ~ 1836년 3월 19일 살았으며 조선 시대 후기의 문신입니다.

당시 왕족으로서 이름은 구(球)이고 자는 치수(稚受)이며 원래 이름은 채중(采重)이며 채중(寀重)으로도 기록 되고 있습니다.

시호는 영희(榮僖)이며 충정(忠正)입니다.

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는 흥선대원군의 친부이며 고종 황제의 할아버지입니다.
원래는 인평대군의 6대손 이었습니다.


아들이 없이 사망한 사도 세자의 넷째인 서자 은신군의 양자로 입양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의학적으로는 정확한 가계보가 아니지만 조선 시대식 왕위 계보를 성립 시킨 것입니다.

철종 실록에는 왕족의 한 사람으로 품행이 모범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양자로 입양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생가 근처에서 생활했다고 합니다.

순조 실록에는 권력 남용 등으로 좋지 않게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족보는 좀 복잡하지만 인평 대군의 6대 손이고 능창군의 7대 손으로 왕위 계승권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계동궁의 상속권도 얻게 되고 왕위 계승권에도 가까워 지게 되었습니다.
현대적으로 말 한다면 희박한 확율의 통로를 이어가다가 기회가 왔을 때 자기 것으로 변화 시킨 사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남연군묘 에서 바라본 하부 전경
남연군묘 에서 바라본 하부 전경
남연군묘 상여각
남연군묘 상여각
남연군묘 상여
남연군묘 상여
남연군묘 상여
남연군묘 상여

석문봉을 주봉으로 좌우 가야봉과 옥양봉으로 입시하고 가운데로 힘차게 움직이며 뻗어 내린 지형으로 좌우 날개는 끝까지 잘 뻗어 감싸는데 청룡이 좀더 크게 펼쳐진 향태이며 산소의 좌는 작은 산 봉오리처럼 뭉쳐 끝나고 끝은 길게 뻗었는데 지금은 끝이 사라진 형태로 남아있습니다.

 

저는 이곳의 명당 스토리를 재미있는 역사로 보지만 천하 명당을 구하고자 애쓰는 부질없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만약에 그런 곳이 있다고 하더라도 권력에 집착해서 조상을 모실 생각은 없습니다.

주어진 인생을 모나지 않게 살다보면 후손도 무난하게 인생을 살게 되리 라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야산 등산후기 바로가기 https://fmtview.com/207

 

 

 

남영군묘지세
남영군묘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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