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부사 유심(東萊府使 柳沈)과 전생(前生)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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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 5. 25. 19:47
전생 어머니를 만난 이야기의 주인공
동래부사 유심(東萊府使 柳沈)의 애틋한 이야기
전생 어머니를 만난 실존지역 동래성 내성지구는 지금의 칠산동이나 수안동 부근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배경으로 전하는 이야기입니다.동래부사 유심 선정비(東萊府使 柳沈 善政碑)가 옮겨 저서 지금은 부산박물관 뜰에 있는데 맘먹고 찾아서 사진을 찍어 왔습니다.
동래부사 유심(東萊府使 柳沈)의 선정비를 보면서 역사적인 설화를 재 편집해 봅니다.
동래는 부산을 대표하는 옛날 동래부의 중심지로 동래부 관아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 중의 하나입니다.
유심 부사는 실존 인물로서 선정을 베풀어 그의 선정비가 잘 남아 있는 사람입니다.
동래부사 유심 이야기는 전래 동화처럼 구전되어 내려오면서 많은 각색이 있어 비슷비슷한 것들이 많지만 바로 이곳 동래가 그 진원지입니다.
유심(柳沈)의 선정(善政) 비는 조선 중엽 동래부사를 지낸 후 제작된 것으로서 기록이 잘 보존된 자료이며 석물은 부산 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지만 자세히 보지 않을 뿐입니다.
이 비석의 당사자인 유심(柳沈)에 대한 이야기는 동래 내성 안에서 일어난 실제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더 실감 나며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나이 든 분들은 많이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실존인물 동래부사 유심과 같은 인물인지는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같은 인물로 추정하면서 이 글을 씁니다.
사람이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는 하나의 설을 증명하는듯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이룬 내용과 지극한 염원에 대한 보상 같은 것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조선 중기 어느 봄날 동래부사가 행렬의 앞뒤에서 악사들이 연주를 하며 환영하는 화려한 부임행차를 하면서 내성 안으로 들어옵니다.
성내 주민들은 너도나도 새로 부임하는 부사의 행차를 구경하러 길가를 메우는 시끌벅적한 날이었습니다.
이날 성내 가난한 산비탈 동네에 남편을 일찍 보내고 어린 아들과 단둘이 사는 한 젊은 과부도 아들의 손을 잡고 구경하는 사람들의 틈새에 나와 있었습니다.
그 아낙은 당시 네 살배기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성숙되고 잘생긴 얼굴에 총명한 어린 아들을 의지하며 살았더랍니다.
성대한 환영 행사의 주인공은 늠름하고 당당하게 큰 말을 타고 화려한 의관을 입고 고을의 백성들을 두루 내려다보며 마침내 과부와 어린 아들의 앞을 지나갑니다.
지금도 동래의 향토 민속은 전국적으로 유명한데 그 역사는 조선 시대로 또는 더 이상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날도 새로 부임하는 환영 행사는 동래 명기(名妓)들의 팔선녀(八仙女), 대군(大軍 ) 등의 놀이로 흥을 돋우며 말을 타기도 하면서 행사는 고조됩니다.
이런 성대한 행사 때는 동래 주민뿐만 아니라 이웃 고을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와서 환호하는 잔칫날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좋은 행사의 주인공인 신임 동래부사를 바라보던 이 어린아이는 갑자기 또렷하고 자신 있게 "어머니, 나도 커서 저렇게 훌륭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가난한 엄마는 아들에게 할 말을 잊었습니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 가슴이 미어지는 심정으로 총명한 아들에게 힘없는 목소리로 "너는 그렇게 될 수 없단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총명한 아이는 다그치며 끈질기게 그 이유를 묻기 시작합니다.
“어머니, 왜 저는 커서 어른이 되면 저렇게 될 수 없습니까?"라고 시작해서 마침내 슬픈 어머니의 목소리로 하는 천출은 벼슬을 할 수 없는 이유까지를 듣게 되었습니다.
어린 아들이 스스로 천민으로 태어나서 이 세상에서 희망이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벼슬은 천민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이며 아직 체념해야 하는 나이가 되기도 전에 알고 만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실망과 좌절이 어린 가슴을 짓누르게 되고 어린이는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울다가 지쳐서 쓰러지고, 또 깨어서 울다 지치기를 반복하며 음식도 먹질 않다가 아이는 그날부터 시름시름 원기를 잃고 얼마 뒤에 병을 얻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삶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아들이 과부에게서 떠나고 슬픔과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꿈속에서 죽은 아들을 만났습니다.
“어머니! 너무 슬피 울지 마세요. 저는 한양에서 재상을 지내는 유 씨 가문에 태어나서 잘 살고 있답니다."
"어머님, 이젠 부지런히 공부하면 벼슬도 할 수 있으니 걱정 마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날은 밝았습니다.
세월은 흐르는 강물처럼 슬픔도 좌절도 함께 가져가고 강산이 몇 번이나 바뀐 후에 과부도 백발 노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의지하던 아들을 잊을 수는 없었으며 아들의 제삿날엔 정성껏 제사상을 차려놓고 그때를 생각하며 아이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통곡을 합니다.
울면서 “내 아들아 많이 먹어라. 네가 좋아하는 음식을 차려 놓았단다.” 하고 밤을 지새우곤 합니다.
한양의 유씨가문에서 총명하게 자라는 유심은 이상하게도 매년 같은 날 밤에 꿈속에서 어느 초라한 초가집에 들어가게 되며 거기서 어떤 제사상을 받고 음식을 잘 먹곤 합니다.
유심은 양반가의 훌륭한 도령으로 성장해서 나라에서 치르는 과거에 당당히 급제한 후 마침내 오늘 동래부사로 부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동래부사 유심은 처음 받은 관직으로 처음 오는 남쪽 끝의 동래 땅에서 환영을 받으며 간간이 바라보는 노변이나 풍경이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았음을 느끼게 됩니다.
언젠가 어느 날 꿈속에서 와 본 적이 있는 그런 느낌 말입니다.
부임 후 따뜻한 어느 봄날 복사꽃 흐드러지게 핀 부임 첫 생일을 맞았습니다.
지금도 생일을 맞은 사람에게 특별 배려를 하듯이 부사도 생일날 한가한 마음으로 내성을 한 바퀴 돌다가 문득 낯설지 않은 비탈길 동네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떠오르는 꿈속의 그 집이 생각나서 곧 유부 사는 관아의 한 평인과 함께 자세한 동네의 내력을 물은 뒤 꿈속에서 본 길을 마침내 찾아 나섭니다.
해는 뉘엿뉘엿 어느덧 어둠이 깔리는데 부사는 무언가에 홀린 듯 누구에게 이끌리듯 길을 걷습니다.
조금 후에 나타난 길은 언제나 다니던 길같이 익숙한 비탈길입니다.
이윽고 꿈속에서 보던 기울어진 작은 초가집을 만납니다.
초가집에서는 너덜거리는 문틈 사이로 희미한 호롱불이 보이고 반쯤 열린 방문 사이로 백발 노파가 제사상 앞에서 흐느끼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간 유부 사는 마음을 가다듬고 자기가 부사라고 밝힌 후 백발 노파에게 정중히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물어봅니다.
"노인은 누구 제사이길래 이리 슬피 우시는지요?" "본디 일찍 청상이 되어 아들 하나를 의지하며 살았는데 그 어린것이 꿈도 못 펴 보고 4살 먹은 해에 떠났답니다.
오늘이 그 불쌍한 내 아이의 기일이라서 혼이라도 불러볼 요량으로 생전에 좋아하는 음식을 차리고 보니 복받치는 설움 때문에 운답니다."
유 부사는 그제야 오늘이 자신의 생일이라는 것이 떠오릅니다.
노파의 말은 계속되고, 아이가 죽은 후 얼마 뒤에 '꿈속에서 한양 유 씨 가문에 태어났다고 했었습니다.'까지 말하게 됩니다.
여기서 부사는 온몸에 전율이 흐르고 이 노파가 바로 전생의 자기 어머니였음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는 일어나서 늙은 어머니 앞에 큰절을 올리면서 말했습니다.
“어머니 많이 기다렸습니다. 4살 때 어머니를 두고 떠난 그 아들이 이제야 돌아왔습니다.”
하고 유부사도 한참을 울었습니다.
전생의 모자(母子)였음이 확인된 두 사람은 회한과 사랑으로 잡은 손을 놓지 못하고 목놓아 울어야 했습니다.
이후 부사는 동래부에서 떠날 때까지 전생의 어머니를 위해 지극한 예를 갖추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어 노파는 여생을 편히 살았습니다.
아울러 동래부사의 백성 사랑은 전생 어머니 대하듯 해서 노인을 공경하며 선정을 베풀어 동래부를 떠나는 날 동래 성내 백성들이 환송하며 세운 선정비가 지금도 보존되고 있으며 부산 박물관에 귀한 자료로 보관되고 있습니다.
전생의 어머니를 직접 상봉한 이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회자되어 전해 오지만 동래부사 유심 이야기가 오리지널이며 다른 지역의 유사한 이야기들은 파생된 설화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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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시립박물관에 있는 '동래부사 유심 선정비(東萊府使 柳沈 善政碑)'는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 유심 선정비는 1649년(효종 원년) 11월부터 1651년(효종 2) 7월까지 동래부사를 역임한 유심(柳沈)의 선정비입니다.
동래부지의 기록에 의하면 동래부의 7개 면에 모두 선정비가 세워진 동래부사로는 유심이 처음인데, 이는 유심이 동래부사에서 바로 경상감사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며 그의 선정비는 상투적으로 떠날 때 만든 것이 아니며 정말로 칭송할만했다고 생각됩니다.
글 <시니어 리포터 정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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