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 스님이 다니던 그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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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스님이 다니던 그 길을 걸으며.


경주 신라역사탐방 여행길에서 빠질수 없는 분황사(芬皇寺)에서 원효이야기를 들으며 모전석탑(模塼石塔)을 둘러본다.

일천300녀년의 세월이 훨씬 지난 지금 분황사(芬皇寺) 입구에서  원효학연구원의 입간판을 보게되어 누구에게 감사해야할지는 모르지만 좋은 감정이 솟는다.


원효대사라 부르지만 살아생전 그는 이미 소성거사(小性居士)가 아니든가.

그의 일심사상(一心思想),화쟁사상(和諍思想),무애사상(無碍思想)을 나같은 여행객이 알리가 없지만 그래도 열심이 설명하는 어떤분 때문에 이렇게 글로서 옮길수 있어서 기쁘다.


아들 설총(薛聰)을 본 후에 파계(破戒)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바로 원효사상이 아닐런지 생각해 본다.
그후에 이곳 
분황사(芬皇寺)에서 화엄경(華嚴經),사십회향품소(四十廻向品疏)를 저술했다.
그리고 그의 지고한 불전해석서인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으로 왕실에서 강론을 한 자취라고 하는 길을 따라서 아주작은 흔적이라도 느껴 보려고  분황사(芬皇寺)를 찾았다.



분황사(芬皇寺)


신라 문무왕 재위때에 원효가 주창한 불교적인 사상이 독창적으로서 당시에 해동종(海東宗)이라고 불린적이있었다.그 불교사상이 분황사(芬皇寺)에서 정립되었다고 해서 분황종(芬皇宗)이라고도 한다.

다라서 오늘 방문한 이 분황사(芬皇寺)는 원효스님과는 가장 밀접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원효와 의상은 여러 부분 많이 가갑게 이야기 되지만 또한 많이 다른부분이 보여진다.
두 스님이 한반도 남부지역 많은 사찰에서 불교사상을 집대성하고 정립하며 수확한 흔적들이 있지만 이곳 
분황사(芬皇寺)는 원효스님의 가장 두렸한 흔즉이 남겨진 곳으로 생각한다.


원효스님이 입적한후 아들 설총(薛聰)이 원효의 진영을 만들어 공경하는 예배를 올린기록이 있다.

일년(一然)의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진용(眞容)은 고려말 까지 실존했으며 이 진용은 설총이 예불할때 고개를 돌려서 바라본다는 기록이 있음으로 삼국유사를 쓸때까지는 존재했다고 보는 것 이다.


이 진용(眞容) 사람의 모습을 사실대로 그린 얼굴모습이거나 형상을 말 하는것이며 원효의 진용은 소상(塑像)즉 흙으로 빚어져서 만든 토상이라고 한다.


아래는 분황사에서 담은  몇장의 사진입니다.


당간지주분황사 당간지주


분황사 모전석탑(模塼石塔)분황사 모전석탑(模塼石塔)


분황사 모전석탑(模塼石塔)분황사 모전석탑(模塼石塔)


분황사 모전석탑(模塼石塔)분황사 모전석탑(模塼石塔)


분황사 원효연구원분황사 원효연구원


 


 

원효(元曉, 617년 ~ 686년 4월 28일(음력 3월 30일), 경상북도 경산시)는 삼국시대와 신라의 고승이자 철학자, 작가, 시인, 정치인이다. 원효는 법명이고, 속성(俗姓)은 설(薛), 속명은 사(思),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며, 별명은 모(毛), 호는 화정(和淨)이다. 아버지는 내말 설담날이며, 태종무열왕의 둘째 사위이고 설총이 그의 아들이다.


별명은 소성거사(小姓居士)이며 이외에도 서곡사미(西谷沙彌), 백부논주(百部論主), 해동법사(海東法師), 해동종주(海東宗主)라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원효보살, 원효성사(元曉聖師)라 존칭되고, 화쟁국사(和諍國師)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본명은 설사(薛思)이나, 보통 한국에서는 법명을 따라 원효대사로 불린다.

경주 설씨와 순창 설씨의 중시조인 설총의 생부이며, 한국불교 최초의 깨달은 스님, 한국 최초의 대처승으로도 유명하였다.

-- 위키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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