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8경 임경대(臨鏡臺)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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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 6. 23. 19:28
양산비경(8경) 임경대(臨鏡臺) 탐방
시(詩)
황산강(黃山江) 임경대에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6~ ?)
안개낀 봉우리들 빽빽하고 물은 넓은데,
거울속에 비친 인가들 푸른 봉우리와 마주하네.
외로운 돛배 바람안고 가는데,
날으던 새 갑자기 자취없어 아득하구나.
(주: 임의 번역 편집)
烟巒簇簇水溶溶 -연만족족수용용
鏡裏人家對碧峰 -경리인가대벽봉
何處孤帆飽風去 -하처고범포풍거
瞥然飛鳥杳無終 - 별연비조묘무종.
황산강(黃山江)은 지금의 낙동강을 말 하며 임경대(臨鏡臺)는 거울을 바라보는 언덕이란 뜻이지요.낙동강 너름 물을 바라보며 자연이 만든 거대한 거울이라 하고 거기에 비친 아름다운 그림들을 노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운(孤雲)최치원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자연히 해운대(海雲臺)를 마나게 되며 또다른 자는 해부(海夫)이며 여기 임경대(臨鏡臺)를 만나게 된다.
고운(孤雲)이라고 알려지고 있는 최치원의 또다른 자(字)는 해운(海雲), 해부(海夫)이다.
고운(孤雲)최치원은 12살에 당나라에 유학해서 18살에 당의 과거에 급제하고 승무랑시어상내공봉 등으로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중국 남방의 황소의 난때 그유명한 "토황소격문"으로 반란을 토벌하는 공을 세운것을 볼때 뛰어난 문장력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29세에 신라로 귀국하지만 국운이 저물어가는 시기었다.
국가를 혁신하는 골품제의 개혁과 과거제도를 실시하자는 등의 골자로 시무(時務) 10조를 진성여왕에게 청 하지만 ,시행되지 않았고 그는 벼슬을 버리고 유람하는데 우리는 이때 남긴 자취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자 고운(孤雲)처럼 외로운 구름(孤雲)을 연상케 하듯이 신라방방곡곡을 유람했음을 느낄수 있다.이때 부산 해운대,거창 수승대,합천의 백운동등을 답사하며 시와 함께 지명을 남기게 된 것이다.
이곳 낙동강가의 아름다운 비경에서도 잠시 머물며 "황산강(黃山江) 임경대에서"라는 시를 남겼으며 지명이 연유하게 된다.
양산비경 임경대는 그의 자를 빌려서 고운대 혹은 최공대라고도 하고 있다.
천재는 외롭다고 했던가 ?
후세에서는 너무 고매하고 앞선 학문으로 아마도 시대가 맞지 않았을것으로도 생각해 보며 능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한 안타까움을 말 하기도 한다.
고운의 생을 마친 흔적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홀연이 사라젔다고 한다.
그래서 856~ ?으로 표시되고 있다.
당에서 돌아와 그가 집필한 서책들을 모아서 헌강왕에게 바쳤던 "계원필경"은 한국 최고(最古)의 문집이다.또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난랑비서(鸞郎碑序)"는 화랑도의 사상을 이해 할수 있는 자료로 알려지고 있다.
고운(孤雲)은 경주 최씨(慶州 崔氏)의 시조라고 합니다.
그분은 신라 말기의 문신으로서 유학자이며 뛰어난 문장가이시다.당나라나 신라 왕실에서 벼슬도 했지만 정치가로 말 하는 곳을 보지 못했다.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해부(海夫)이며 시호는 문창(文昌)이다.
고운 최치원 자세히 보기 링크
https://ko.wikipedia.org/wiki/최치원
임경대(臨鏡臺)가는길
참고: 부산 구포에서 무궁화호 완행열차를 타고 물금역에 내려서 길걷기로 약 4Km정도를 도보로 갔다가 푹쉬고 다시 물금으로 돌아와서 기차타고 부산으로 왔습니다.
물금역
양산8경 임경대(臨鏡臺)
양산8경 임경대(臨鏡臺)
임경대(臨鏡臺)유적지
양산8경 임경대(臨鏡臺)
양산8경 임경대(臨鏡臺)
양산8경 임경대(臨鏡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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