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충신(忠臣) 충장공(忠壯公)이 된 화산군(花山君)천만리(千萬里).
- 여행-유적-역사인문전반/역사-고전
- 2015. 12. 13. 17:34
조선충신(忠臣)이 된 명(明)나라 장수 천만리(千萬里).
부산 자성대 기념비로 보는 근대사의 인물 조선 충신 화산군(花山君) 충장공(忠莊公) 천만리(千萬里).
근세사의 귀화인물 천만리(千萬里)장군은 무신으로서 명(明) 나라에서 귀화한 후 대를 이어 조선조정에서 충신으로 살았으며 충장(忠莊)이라는 시호를 받고 전국 각지에 조정이 배향하는 인물로서 [두산백과 - 천만리],[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천만리], [인명사전 - 천만리]등에 등재 소개되고 있는 조선 충신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장군은 중국 허난 성의 영양(潁陽)이 본관이고 중국에서의 가계도는 시조 천암(千巖, 1350~?)이 서촉(西蜀) 종북산(終北山) 천고봉(千古峰) 만인암(萬仞巖) 밑에 살았으며 그래서 성이 천 씨로 된 정도로서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우리나라에서는 영양천 씨(潁陽千氏)의 중-시조십니다.
명나라에서 무신으로 조선 전쟁에 참전한 후 귀화해서 조선 문신으로 여생을 살았으며 저서로 시 44수와 문 2편이 '사암천문집'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장군은 명나라의 수위사 겸 총독장(守衛使兼總督將)으로 정유재란 때 조선에서 전공을 세우고 귀화하여 한국 영양 천 씨의 중시조가 되시었으며
충장공(忠壯公)시호를 받은 조선조정의 충신(忠臣)입니다.
*********
정유재란(丁酉再亂)은 1597년 8월 도요토미 정권의 일본군이 임진왜란의 정전 회담이 결렬됨에 따라서 재차 조선을 침공하여 약 1년여 동안인 1598년 연말까지 지속된 전쟁임.
*********
이하 장군의 대략(大略)과 유적을 알아봅니다.
숙종조에서는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하고 종향(從享)했습니다.
고성(固城)의 호암서원(虎巖書院-호암사(虎巖祠)), 청도(淸道)의 황강서원(皇岡書院 - 황강사(皇岡祠)), 문경(聞慶)의 노양각(魯陽閣), 진양(晉陽)의 만점각(萬瞻閣), 안동(安東)의 동산서원(東山書院), 남원(南原)의 환봉사(環峰祠) 등 전국에서 배향합니다.
현재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부산진 지성이었던 자성대(子城臺) 누각옆에 장군의 기념비와 안내문이 있으며 쉽게 접근할 수 있어 후세에 기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묘지는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방촌리입니다.
천만리(千萬里) 장군의 대략(大略)
자: 원지(遠之), 호: 사암(思庵), 시호: 충장(忠壯).
천만리(千萬里)는 1543년出生 ~ 歿未詳
부(父) 천종악(千鐘嶽),
모(母) 병부시랑 전탁(錢鐸)의 여식(女息).
부인 : 영녕백(永寧佰) 허언(許彦)의 여식(女息)..
차남 : 천희(千禧)
9세 때부터 외숙(外叔) 전륜(錢倫)으로부터 수학(受學)함.
* 1571년 무과 장원 급제.
* 1575년 총절사(總節使)로서 당시 침공하던 대몽전에서 몽골군을 격퇴함.
*
대몽전쟁의 공훈으로 내직(內職) 내위진무사(內衛鎭撫使)가 됨.*
억울한 참소를 입어 양릉(陽陵)에 귀양살이함.*
귀양8년후 복직되어 태청전수위사(太淸殿守衛使)와 총독오군사를 겸직함.*
태청전수위사때1592년 조선의 왜란에 명나라에서 원병으로 참전하는데 명황제의 명으로 조병영양사(調兵領糧使) 겸 총독장(總督將)이 되어 조선-일본 전에 파병됨.
* 아들 천상(千祥), 천희(千禧)와 함께 3 부자가 당시 총대장 이여송(李如松) 휘하에서 군량 수송업무를 관장함.
*
장군은압록강(鴨綠江) 건너 곽산(郭山)에서 첫 전투를 치르는데 철기군(鐵騎軍) 2만 명으로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 휘하에서 대승을 거둠.
* 지체 없이 평양(平壤)으로 진군해서 주둔하던 왜병을 포위 공격함.
* 제3차 공성전에서 대포로 평양성 칠성문(七星門)을 폭파하고 승세(勝勢)를 몰아 적군 1,280여 급(級)을 제거하는 성과를 거둠.
* 연전 전승하며 한반도를 남하하여 지금의 부산인 당시 동래(東萊) 성까지 진군해서 왜적의 전의를 크게 상실하게 함.
*
1597년 정유재란 당시 마귀(麻貴)제독 휘하로 조선에 파병됨.*
중사마(中司馬)직책으로 왜병과 직산(稷山)에서 조우하는데 매복 전술로 대승하는데 당시 적군이 잡초가 쓰러지듯 했다는 일방적 승리를 함.*
이후 왜군은 울산(蔚山)까지 도망 치고 버티는데 계속 공격해서 완승을 거둠.*
당시의 큰 공로를 인정한 기록으로 지금의 서생인 당시 서생진(西生鎭)의 바위절벽에 새겨놓음.조선인 천만리(千萬里) 장군의 대략(大略)
왜란이 종전이 되고 1600년 선조 33년 8월에 참전 했던 명장 만세덕(萬世德)과 이승훈(李承勛)은 명나라 본국으로 귀국함.이때
천만리(千萬里) 장군은 두 아들과 함께 조선에 머물러 귀화합니다.
그는 한양에 머물며 조선 명산을 다니는데 그때 금강산(金剛山)을 세 번 탐방하고 두류산(頭流山)을 두 번 탐방했다고 합니다.
이때 머무는 곳에 시를 읊어 심정을 남깁니다.
시심(詩心)은 대체로 고국 명에 대한 그리움과 이국땅의 고신(孤臣)을 표현함.
장군은 이미 당시의 명나라가 국운이 다 해 감을 알고 오랑캐로부터 짓밟히는 곳에 후손의 삶을 맛기지 않는 선견(先見)으로 당시 사상이나 철학이 비슷한 조선에 남고자 한 것입니다.
명나라는 장군의 예측대로 오래가지 못하고 망합니다.
당시 선조는
천만리(千萬里)를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봉조하(奉朝賀)의 벼슬을 내려 화산군(花山君)에 봉하고 하사금 전(田) 30결(結)을 함께 내려 신하로 삼습니다.******
[비공식 추정] 1결의 현대 땅넓이:대충 3000평정도로 추정.
+++++
그의 장남 천상(千祥) 또한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으로 차남 천희(千禧)는 평구도찰방(平邱道察訪)으로 벼슬을 삼아 자손대대로 세록을 전수받게 하여 깊은 신하로 대우합니다.
******
당시 한성부에는 종2품 벼슬 정원 2인이 있었으며 부윤(府尹)에 는 좌윤과 우윤이 있었습니다.
현대 관직으로 볼 때 종 2품은 대법원 검사장,차관보,부시장,부지사,군인 중장 정도의 벼슬입니다.
******
숙종(肅宗)에 이르러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해서 종향(從享)함.
1827년 순조(純祖)때는 신주(神主)를 부조(不祧)함.
1910년 7월 26일 순종은 종헌으로 높이 칭한다는 뜻으로 충장(忠莊)이라는 시호를 하사함.
이로서천만리(千萬里) 3 부자는 조선의 신하로서 조정의 충신으로 후세에 길이 남게 됩니다.
장군의 두 슬하는 각각 6남, 4남을 두시며 한국 영양 천 씨 10파를 이루었고 융성한 후손이 이 땅에 번성하게 되었으며 유구히 이어 갈 것입니다.
부산 자성대 공원에 조성된 천만리님의 행적을 보면서 공인으로 후세에 남긴 업적과 시대를 예측하고 과감한 결단력으로 미래를 성취하신 것을 생각하며 개인적으로 우러러 마음에 새기는 자세로 포스팅합니다.
혹시라도 어휘 선택에 무리가 있거나 표현에 오류가 있다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
땅 넓이 "결" 벼슬 "부윤"은 검증된 자료가 아닙니다.
일반인의 지식으로 천만리 장군에 대한 이력을 공부하는 자세로 알아본 것이며 부족한 내용이 많을 것입니다. 잘못된 곳을 댓글이나 방명록으로 지적해 주신다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첨삭하겠습니다.
구당(龜堂) 남휘(南暉)와 정선공주(貞善公主)의 분묘(墓).
이 글을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