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동래에는 역사 유물이 많습니다.

동래에는 가야 고분도있고 장영실 작품도 전시합니다.

동래읍성(내성)은 살아있는 노천 박물관이지요.


가깝게는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이라는 유명한 명구를 남긴 동래성 전투의 흔적이 내성과 충열사와 읍성유적등에서 볼 수있고 ,
멀게는 복천 고분군과 복천 박물관에는 3~5세기 부근의 중요한 가야 역사 유물들이 즐비합니다.


조선시대 과학자 장영실이 동래 사람으로서 그의 작품들도 잘 전시되고있지요..
역사성이 밀집한 이곳엔 대포산이 자리잡고있는데 마안산이 제 이름인데 한국전쟁때 부터 대포산으로 불린것입니다.


대포산에서 학설로 표방하는 풍수지리 이론으로 볼때 학의 배 부분에 고분군이 있고 학소대라 불린 곳을 학의 발로 보며 힘차게 비상하는 형국입니다.


아침에 박물관 주차장을 시발점으로 100세계단을 지나서 북장대를 돌아 북문과 장영실 작품전시장을 한바퀴 돌고오며 남기는 산책기입니다. 


주해:戰死易假道難 -전사이가도난

"싸워서 죽기는 쉽지만 길을 열기는 곤란하다"라는 명구인데 임진왜란 초기 동래성에 도착한 왜장이 성문을 닫고 지키고있는 송상현 동래부사를 향하여 공격하기 이전에 "전즉전의 부전즉가도(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고 쓴 깃발로 "싸우고 싶다면 싸우고 싸우기 싫으면 길을 열어라"고 한 말에 대한 대답입니다. 


동래읍성 북문SONY | ILCA-77M2동래읍성 북문
동래 읍성 북문입니다.

읍성에는 인생문이있고 남분이 있었지만 지금은 볼 수 없으며 이곳이 가장 멋진곳입니다.

북문과 나졸SONY | ILCA-77M2북문과 나졸

SONY | ILCA-77M2

마안산 -대포산 정상에있는 동래읍성 북장대입니다.


대포산 100세계단SONY | ILCA-77M2대포산 100세계단

북장대 오르는 소나무 숲속의 300개 백세계단입니다.


가야시대 무덤 복천고분군SONY | ILCA-77M2가야시대 무덤 복천고분군

복천 고분군입니다.


동래 전경SONY | ILCA-77M2동래 전경

대포산에서 바라보는 동래지역입니다.

아시아드 경기장도 보입니다.


복천고분SONY | ILCA-77M2복천고분

복천고분군


장영실 작품SONY | ILCA-77M2장영실 작품

장영실 동산


동래읍성 북문SONY | ILCA-77M2동래읍성 북문

동래읍성 북문.

동래읍성은 내성이라고도 합니다.

이 곳엔 지금도 내성 초등학교가있으며 성 안이라는 내성이라는 말이 많이 쓰이고있지요.



Posted by RiverWind blogessay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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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 역사유적-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



-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부산동래 금강공원내에 있는 역사유적.

부산시 지정기념물 제 13호


부산 동래의 금강공원을 가면 얼핏보기에 사찰같이보이는 아늑한 장소가 있다.
특히 바로 인접해서 금정사라는 사찰이 있어서 더욱 그런분의기가 나기도 한다.
입구의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서 있어 쉽게 알아볼수 있다.

금정사 옆의 동래부사들의 선정비가 쭉 늘어선 입구를 지나서 운치좋은 솔밭길로 들어서면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을 만난다.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SONY | DSLR-A300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


이곳이 있기까지의 그때를 간단히 회고하면 때는 1592년 임진년 선조 25년 오전에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수많은 군선과 함께 부산진첨사 정발이 지키고 있던 부산진성을 공격하고 함락시킨다.


이미 소식을 들은 동래부사 송상현은 죽기를 각오하고 전투준비에 임했다. 

인근 지원군도 속속 도착하고 전투준비를 했으나 워낙 중과부족으로 어려운 전쟁임을 알지만 동래성의 민관군은 일심 단결했다.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여세를 몰아 고니시 유키나가는 동래성에 도착하자 성 앞에서 병력을 과시하며 戰則戰矣 不戰則假道 -전즉전의 부전즉가도- 즉 "싸워 보고싶다면 싸우고 싸우기싫다면 길을 비켜라" 라는 오만한 글을 전투를 하기전에 송상현에게 깃발에 달아서 보여주며 시위한다.


자기들이 남의 땅에서 지나갈테니 무력을 앞세워서 길을 비키라는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송상현은 왜군이 한반도에서 저지를 노략질을 잘 알고 부산 동래성을 죽기로 사수할 결심을 하며 戰死易假道難 - 전사이 가도난- 즉 "죽기는 쉬워도 길을 열기는 어렵다"라는 글귀를 성루에 내 걸었다.


곧 양 진영은 전투로 돌입하게 되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데 이것이 임진왜란의 서막인 동래성 전투이다 . 

동래성전투는 초반에는 송상현이 방어 준비를 워낙 잘 해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쉽게 점렴하지 못하고 한때 후퇴했지만,곧  병력을 재투입해서 전투가 계속되며 송상현은 극심한 전투력의 중과부족으로 궁지에 몰리며 성안의 백성들까지 힘을 합쳐 조총앞에서 돌맹이를 던지는 지경까지 가는 혈전속에서 고귀한 충절을 보여주며 최후를 마친다.


이로서 임진년 왜구들의 침략전이 한반도 전체를 유린하며 암담했던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시작된것이다.


송상현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부채에있는 자신의 아버지인 사헌부 감찰 송흥복에게 편지를 써 보내고 조복을 갈아입고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서 북향사배를 올린다. 


동래성은 함락되고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장수 송상현에게 크게 감동하며 적장을 자신의 가족처럼 예를 다해서 극진한 수준의 장례식을 치루었다. 

부하들에게는 송상현의 충직함을 본받으라고 훈시한다.


송상현은 사후 이조판서 찬성으로 추증되었으며 그분의 영구는 현재 동래 안락서원(安樂書院)과 충렬사에 모셔저서 제향되고 있다.


***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 ***

이때 관군은 말할것도 없고 이름없는 백성들이 의연하게 일어나 동래읍성을 지키려는 전투에서 수많은 순사(殉死)자를 내는데 이 때 순사(殉死)한 성민들의 유해를 거두어 만든 무덤을 본래장소에서 몇번 옮겨 현재의 장소 동래금강원에 안치한곳이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 즉 부산시(도)기념물 제13호 이다.


기록에 의하면 1731년 영조 7년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허물어진 동래읍성을 수축하다 임진왜란 격전지 남문터(지금의 수안로타리)에서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의 유골을 발견하고 이 유해를 거두어 함에 안치해서 삼성대(三姓臺)의 서쪽 산기슭 현재 내성중학교 부근에 여섯개의 무덤으로 만들고 안장했다.

그리고 '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이라는 비석을 세웠다.


관에서는 소요되는 제전(祭田)을 지급하여 동래향교에 맡겨서 매년 추석에 유생들이 제사를 모셨다.

그리고 전쟁발발일을 순절일로 하고 제사를 모신다. 

일제말기에 토지개간으로 무덤이 파괴되고 현재 복천박물관 부근 복천동 뒷산 영보단(永報壇)부근으로 이장하였다가 1974년 금강공원 내 현재의 자리에 한개의 무덤으로 만들어 봉안하고 있다.


현재 동래구와 동래문화원에서 이 분들이 순절하신 매년 음력 4월 15일에 구민들의 정성으로 제향을 일체를 봉행한다.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SONY | DSLR-A300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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