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국사(興國寺)와 허황옥(許黃玉)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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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 5. 24. 12:12
흥국사(興國寺)와 허황옥(許黃玉) 이야기.
재미있는 역사탐방.
산길 따라 걷다 보면 요란한 이정표나 꾸며진 구조물은 없지만,
대충 감잡아서 가끔 보이는 몇 개의 연등이 나무에 걸려있는 것으로 사찰 가는 길이겠거니 하고 완만한 산길을 오른다.
한참을 가다 보면 이윽고 소박하게 세워놓은 1m남짖한 크기의 한글로 흥국사라고 새겨진 석판을 보면서 경내로 들어선다.
옛날 어느 시골집의 마당을 들어서는 느낌으로 대나무로 얼기설기 처분 텃밭의 울타리를 지나서 마당 앞 계단 앞에 서면 아련한 듯 청아한 찬불가가 맑은 햇빛과 함께 향기로운 숲바람 타고 다가온다.
계단을 올라서면 안옥(安屋)하게 감싸는 산세에 자리 잡은 마당 끝 중앙에 대웅전이 단아하게 좌정하고 있다.
청아한 찬불가(讚佛歌. Buddhist가 은은하게 깔리고 산새소리는 간간이 찬불가를 반주하듯 들리는 큰 법당 마루에 앉아서 잠 쉬 남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염송 하며 몇 번의 늪을 하고 평안한 좌정으로 이곳의 정취에 한참을 빠저 든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駕洛國太祖王)이 허황옥(許黃玉, 33년 ~ 189년)과 이곳에서 초야(初夜)를 보낸 곳이라는 이야기 때문에 명월 사지(明月寺址)로 알려진 이곳에 세운 흥국사(興國寺)에 숨겨진 자투리 라도 찾아볼까 해서였다.
설에 따르면 김수로왕과 허황옥이 머물던 때 산에 걸린 달이 너무 아름다워 명월산(明月山)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옛날에 인도 야유타국의 공주로서 파사석을 싣고 16세기경 48년에 오빠인 장유화상 및 수행원들과 배를 타고 왔다는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서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일 때에 부왕(父王)과 왕후가 꿈에 말한 상제(上帝)의 명으로 가락국 수로왕의 배필이 되려고 온 것이다.
그때를 잠 시 상상해 보면 공주가 데리고 온 많은 종자(從者)들과 함께 다다른 곳은 낯선 이국땅인 지금의 김해 남쪽 해안에 이른다.다다른 곳은 지금의 경남 창원시 옹동면 용원리에 있는 부인당(夫人唐)으로 들어와 정박을 했다고 한다.
수로왕은 유천 간(留天干), 신귀간(神鬼干)을 위시해서 신하들을 보내 영접하고 왕후로 삼았는데 이때 초야를 보내고 머문 곳이다.
이후 허황후(許皇后)는 10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슬하에 두었으며 맏아들 거등(居登)은 김 씨로 수로왕의 왕통을 이었으며 다음 2명에게 자기의 허 씨 성을 쓸 수 있도록 윤허받아서 허 씨(許氏)로 사성(賜姓) 받았으며 김해허 씨(金海許氏)의 시조로 본다.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의(歸依)하게 되는데 경남하동의 지리산 토끼봉의 하늘아래 높은 절 칠불사(七佛寺)에서 성불(成佛)하는데 이로 인해서 경남 하동(河東)의 화개골짜기의 이 사찰 이름이 칠불사(七佛寺)이며 현재는 화개 쌍계사의 말사로서 특히 가을에 단풍이 아름다운 절로 잘 알려진 곳이다.
흥국사(興國寺)는 한국불교의 전래설에 대한 일부 학설의 근거지이기 때문이다.
가야불교의 전래에 기여했다는 근거는 옛날 명월 사진으로 보는 터에 1956년 흥국사의 칠성각을 건립하려고 터파기 할 때에 화강암재료에 조각된 탑의 잔해인 석탑면석(石塔面石) 일점과 다른 석제품 조각 일점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이 석탑면석을 사진으로 담아서 명암비를 올려본 결과 석불좌상으로 보이는 조각 양쪽에 코브라로 보이는 뱀 두 마리가 마주 보는 조각이 보인다.
오랜 세월에 마멸되기는 했지만 상당히 또렷하고 괜찮은 수준의 조각품으로 보인다.
직접 재 보지는 안 했지만 기록은 이 면석의 크기가 폭 74cm, 높이 52cm, 두께 15cm로 되어 있다.
이 면석의 크기로 보아서 이것을 사방에 붙인 탑의 크기도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다.
먼 거리에서 운반된 탑이라면 그리 크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뱀의 문양과 불타의 문양은 인도의 야요오디아에서 볼 수 있는 무칠리디아라는 사왕(蛇王)과 흡사해서 이갓으로 인도 아유타국과 가락국의 문화교류를 입증하는 자료로 보는 견해이다.
정사에 기록된 것은 없지만 가야문화가 남방문화교류에 교두보로 작용한 곳이라는 관점에서 우리나라 남방불교계 유입의 근거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과거 명월사의 흔적인 소위 사왕석((蛇王石)은 현재 흥국사 요사채 극락전 안의 왼편대에 안치되어 있었다.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방문하고도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다.
필자도 종무소에 물어보고 확인한 것이다.
만약 가야의 불교 전래를 기정사실화 한다면 허황옥과 그의 친정 오빠 장유화상의 김해지역에 있는 여러 가지 구전들을 구체화하는 재미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이것이 하나의 이슈가 될 수 있는 것은 불교전래가 고구려 소수림왕 때 초유였다는 역사적인 사실이 뒤바뀔 수 있으며 훨씬 이전에 남방불교가 이미 가락국에 있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불교의 승려인 허황옥의 오빠 장유화상은 금관가야 지역에 장유암(長游庵)이란 사찰을 짓고 불상을 모셨으며 이후 가야지역에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현재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 장유암(長游庵) 경내에는 장유화상의 사리탑이 현존한다.
장유화상의 사리탑은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31호로 등재되어 있다.
부산광역시 강서구 지사동 명동(明洞현) 마을 산 498번지에 있는 이 흥국사는 옛날 명월사(明月寺)에 현재의 흥국사를 1956년 중건한 것이다.
경내에 계곡방향에 몇 개의 비석이 있는데 유난히 크고 오래된 비석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전면에 한자로 필치도 근사하게 새겨진 "가락국태조왕영후유허비(駕洛國太祖王迎后遺墟碑)"라고 된 비석이다.
가락국태조왕영후유허비(駕洛國太祖王迎后遺墟碑)는 한자어대로 해석하면 가락국태조왕이 왕후를 맞이한 장소를 기념하는 비석이라는 내용입니다.
뒷면과 옆면의 작은 글씨들은 마멸이 심해서 몇 번의 촬영과 편집을 거듭해도 글씨를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칠성각 건립 때 출토된 화강암제의 석탑면석(石塔面石)은 명월사 사왕석(蛇王石)이라고 불리며 그 외에도 1983년 1월 한 점의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이 출토되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저서 보존 되고 있다고 한다.
구지봉(龜旨峰)의 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龜山洞)의 고분이 그것이다.
구지봉과 허황후(許皇后)능은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으며 현장에 가면 김해시에서 역사적인 이야기들을 소상하게 안내하는 것을 들을수 있다.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의 부인 허황후는 비석과 능선에 승인 것 처럼 보주태후라고도 한다.
여기의 내용은 교과서에 없는 재미있는 이야기로 다루는 것이며 허황옥의 유래와 지명 종교 등의 내용은 남방(南方) 불교나 불교전래등으로 연관 지을 때는 신중히 다루어야 하며 재미로 하는 역사 이야기 그 이상은 아니다.
허황후(許皇后)가 원래 공주였다 거나 또는 인도에서 왔다거나 등에 대한 진실은 여기서 다룰 수 있는 수준 그 이상이기 때문에 언급을 회피한다.
다만 세월이 흐르면서 어떤 이유에서든 이 부분이 상당히 첨색되고 윤색된 부분이 있다고 한다. 또 이런 종류의 설화는 본인은 모르지만 동남아시아에서도 발견된다고 한다.
흥국사(興國寺) 가는 오솔길
흥국사(興國寺) 사왕석(蛇王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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