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당(龜堂) 남휘(南暉)와 정선공주(貞善公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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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 12. 15. 13:03
구당(龜堂) 남휘(南暉)와 정선공주(貞善公主)의 묘(墓).
왕가의 역사적(王家歷史的)인물.
행정구역으로는 경상남도 창녕군 부곡면 구산리 산 1-2이며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야트막한 산자락 양지바른 곳에 분묘 3기가 있고 그 아래 입구에는 비각이 세워 저 있습니다.
풍수지리적으로도 명지로 알려진 곳입니다.
이곳에 있는 남휘(南暉)와 정선공주(貞善公主)의 묘(墓)는 원래는 경기도 평택군 동천리 사후동에 있는 것을 의령남씨의 후손들이 1974년에 창녕군 부곡면 구산리 산1번지인 이곳으로 이장한 것입니다.
봉분이나 주변땅을 보면 그리 오래된 묘역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서기 1404년 ~ 1424년 2월 25일(음력 1월 25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의산군 남휘(남재의 손자)에게 출가했습니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으며 21세로 아까운 생을 마감했습니다.
부 : 조선 제 3대 태종
모 : 원경왕후 민씨
시아버지 : 의령 남 씨(宜寧南氏) 병소의랑(兵曹議郞) 남경문(南景文)
부마(정선공주의 남편) : 의령 남 씨(宜寧南氏) 의산 위(宜山尉) 소간공(昭簡公) 남휘(南暉)
장남 : 남빈(南份)
손자 : 의산군(宜山君) 충무공(忠武公) 남이(南怡)
차남
장녀 : 대사성(大司成) 신자승(申自繩)과 혼인 - 고려 개국 공신 신숭겸의 후손
南暉(남휘). 貞善公主(정선공주) 墓(묘)
문화재지정 번호 : 도문화재자료 제236호
남휘는 의령남 씨의 칠 세손이며 영의정 남재의 손자입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와 함께 살며 효성 지극하고 인품이 출중해서 조정에까지 알려지고
태종대왕의 4녀인 정선공주의 배필이 되어 태종의 부마가 된 것입니다.
당시 한양에서 경상도땅 의령의 인재를 천거할 만큼 출중한 인물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남휘(南暉)는 누구인가.
이름:남휘(南暉) 본관(本貫):의령(宜寧) 호(號):구당(龜堂)
남휘(南暉)는 의령남 씨 7 세손입니다.
영의정을 지낸 南在(남재)의 손자입니다.
남휘(南暉)는 남이장군의 祖父(조부)입니다.
효심과 인품이 뛰어나다는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태종의 4녀인 정선공주와 결혼하여 駙馬都尉(부마도위)가 되었습니다.
남휘는 세종 때 선위사를 4차례역임하고, 유후사를 로 7차에 걸쳐 활동했습니다.
이후 세종 18(1418)년에 보국숭록대부 의산군(輔國崇祿大夫宜山君)으로 관직을 제수받습니다.
그 후 단종 2년에는 소간(昭簡)의 시호를 받았습니다.
세종 7년(1425) 평양선위사(平壤 宣慰使로) 나갔으며 1426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28년에 대간(臺諫)들의 탄핵을 받아 이천(利川)에 부처(付處)된후 이듬해 석방됩니다.
이후 1433년 황주선위사(黃州 宣慰使)로 이듬해엔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를 다녀옵니다.
남휘(南暉)는 불자(佛者)로서 불심(佛心)이 깊어 불상(佛像)을 만들었고 이를 이유로 문종 2년(1452)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왕이 처벌을 불허하여 무사했습니다.
*주해 :
유후사(留後司).
조선(朝鮮) 초엽(初葉)에 한양을 도읍으로 삼았을 때 두고 온 구도 개성(開城)을 통치(統治)하기 위(爲)해서 만든 지방(地方) 행정(行政) 관청(官廳).
수도를 한양(漢陽)으로 옮긴 후(後)에 많은 뒤처리(-處理)를 해야 하는 중요한 관청(官廳)이었습니다.
원만히 수습이 된 후에는 유후사(留後司)를 개성부(開城府)로 개칭하여 관청으로 남습니다.
사은사(謝恩使)
조선(朝鮮) 시대(時代) 때 나라에 베푼 은혜(恩惠)에 감사(感謝)한다는 뜻으로 외국(外國)에 보내던 사신(使臣)
문화재지정
지정연월일 : 1997. 1.30
문화재시대 : 조선초기 (1404~1455년)
규 모 : 면적 5,000㎡
수 량 : 묘 2기(석물 14점)
담당행정구분:창녕군청 : 055) 530-1000, 창녕군 생태관광과 : 055) 530-1531
남휘(南暉)의 신도비각(神道碑閣)
남휘(南暉)와 정선공주(貞善公主)의 묘(墓) 전경
보는 바와 같이 현재 묘역은 쌍분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다듬은 둘레석으로 감싸고 있습니다.
묘비와 망주석 등의 석물들은 옛날 묘역의 대부분의 모습과 같습니다.
오른쪽이 정선공주(貞善公主)의 분묘(墓)이고 왼쪽이 부마 남휘(南暉)의 분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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